줄거리도, 제대로 된 대사도 없는 연극이 있다.
연극 '혁명의 춤'은 정체 모를 불빛과 소리의 조각이 반복되는 게
전부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연극과 달리 이야기나 서사가 없다.
서로 내용이 이어지지 않는 독립된 8개의 짧은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모호한 블랙박스 형태의 소극장에
관객이 양 옆으로 앉는 구조다.
공연이 시작하면 암전으로 칠흑같은 어둠이 펼쳐진다.
배우들이 손전등 불빛을 간헐적으로 비추며 가운데 무대에 등장한다.
공연 내내 알 수 없는 노래와 총소리와 비슷한 정체모를 소리가
짧게 들렸다가 사라진다. 깃발을 흔들거나, 비밀스러운 곳에 잠입하는 듯한 모습 등
혁명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제시된다.
대사도 거의 없다. '그들 꺼야' '들려' '기다려' 등 단어 몇개 정도의 대사가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은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 사이에서
일정한 패턴과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다.
짧막한 대사, 반복되는 움직임과 소리가 주는 감동이 어느 극보다 컸다.
‘혁명의 춤’은 긴장감과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종일관 벌어진다. 출연진도 흑색 의상을 착용하고 원통형의 대도구나 삼각기둥, 야전침대, 천정에서 늘어진 줄에 달린 소품을 직접 이동시키며 손전등이나 깜빡이는 조명 속에서 가끔 "기다려!" 하고 고함을 지르며 공연을 계속한다. 물론 황색이나 평상복을 입고 출연하기도 하고 총을 겨누기도 하고, 무대위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기도 해 전쟁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청색의 의상을 착용한 미모의 댄서와 "혁명의 춤"을 추는 남성 출연자의 춤은 긴장감 속에 묘한 분위기와 함께 연극 제목과 어울리는 장면이라는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대단원에서 무대의 불이 밝아지면서 출연진이 관객 앞에 늘어서는 장면에서 공연은 끝이 난다. 20대부터 60대까지 출연배우 13명은 각자 전화기, 사진기, 우산, 채찍, 깃발, 총 등 다양한 소품을 사용하며 긴장감을 조성시킨다. 관객들이 무대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는 구조로 공연 중간중간 빛이 비칠 때마다 맞은 편 관객의 표정과 반응을 보게 되는 공연이다.
<혁명의 춤>은 프롤로그, 여덟 개의 짧은 장면,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여덟 개의 짧은 장면은 혁명의 어느 순간, 일어날 수 있는 극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 각 장면들의 내용은 독립적이며 서로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나 반복되는 대사와 동작, 빛, 소리 등이 각 장면을 외형적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마이클 커비는 반복되는 대사, 소리, 움직임 등을 구조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자기의 연극을 구조주의 연극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구조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들이 연극의 전면에 나오면서 이야기는 약화되었다. 구체적인 이야기 대신 모호한 상황이 있을 뿐이다.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황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관객의 상상의 몫이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8개의 상황이 혁명과 관계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혁명도 어떤 혁명인지, 어느 나라의 혁명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구조주의 연극의 대가 마이클 커비(1931-1997)가 쓴 <혁명의 춤>은 1981년 김우옥의 연출로 국내에 처음 공연되었다.
마이클 커비는 미국의 실험극이 크게 성행했던 1960~70년대 뉴욕에서 실험극으로 두각을 나타낸 작가이자 연출이다. 그는 작, 연출뿐만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 배우, 조각, 무용, 사진, 건축 등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70년대에 뉴욕에서 구조주의 극단, 'Structuralist Workshop'을 창설하여 구조주의 형식의 연극을 발표하였고 New York University의 Performance Studies의 교수와 Drama Review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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