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성기웅 '조선형사 홍윤식'

clint 2024. 4. 20. 15:19

 

 

소화 8년 (1933년) 봄, 경성 죽첨정(현재 충정로) 금화장 고갯길에서 갓난아기의 잘린 머리가 발견된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연극이다. 2부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봉관이 쓴 《경성기담》에 실린 “죽첨정 단두유아사건” 에서 소재를 취했다.
극은 마리아가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금화장 고갯길에서 어린아이의 잘린 머리가 발견되자 장안이 발칵 뒤집힌다. 경찰부장은 과학수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내리고, '사건 발생 열 시간이내, 피해자는 만1세 내외 남아'라는 법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수사를 지시한다. 이에 서대문경찰서 사법계의 이노우에 주임 이하 노마, 홍윤식, 임정구 등 형사들이 수사에 착수한다. 일본에서 막 부임해온 조선의 셜록 홈즈(극중 샤록 호움즈) 홍윤식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통해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아간다. 반면 임정구는 심문을 통해 용의자 자백을 받아내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수사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이이의 머리통을 쌌던 ‘하트롱' 봉투를 단서로 수사를 진행하던 홍윤식이 피해자 가족일지도 모를 한창우, 한영이 남매를 찾는다. 그러자 이노우에 주임은 한창우의 죽은 딸 기옥이의 무덤을 파헤치도록 지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기옥이의 무덤에서는 머리통이 잘려 나간 채 몸뚱아리만 남은 아기 시체가 발견된다. 기옥이의 고모인 한영이가 간질병 앓는 손주를 위해 어린아이 뇌수를 구하고 있던 어느 부잣집 영감에게 기옥이의 머리통을 팔아넘긴 것이다. 이로써 사건은 급히 종결되지만, 홍윤식은 처음 발견한 아이의 머리가 기옥이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미심쩍어 한다. 사건 종결 이후 이노우에는 공을 인정받아 내지로 발령받고, 임정구는 만주로 떠난다. 홍윤식 역시 홀연 경찰서를 떠난다.

 

 

 

<조선형사 홍윤식>은 서대문 경찰서 수사반원 4인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추리 극으로 1930년대 경성을 부대에 재현하며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현미경, 혈액형 등 당시 막 도입된 '첨단 과학수사' 방식이 흥미를 유발한다. 2007년 4월에 김재엽 연출, 극단 드림플레이 제작으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했다. 관객 호응으로 7월부터 9월까지 문화공간 이다 2관에서 재공연 했다. 2010년 7월 부산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부산시립극단 제38회 정기공연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는 작가가 직접 연출을 맡았다.

 

 

 

 

일제치하에 사는 조선인의 모습도 꽤나 발랄하게 묘사된다. 식민지배 아래 살인사건 수사가 한창인데도 말희는 미국영화 ‘킹그콩그’를 보며 좋아하고 청춘남녀는 밀회를 즐긴다. 소녀들은 학교를 ‘땡땡이’치고 ‘데파-또(백화점)’ 구경에 나서고, 아낙들은 빨래터에 모여 사랑이 얽힌 복수극일지도 모른다며 뒷담화를 즐기기 바쁘다. 머릿수건 하나로 아낙에서 소녀로 변신하는 세 연기자의 호연에 관객은 한참을 자지러졌다. 이해제의 연극 ‘다리퐁 모단걸’에서 1920년대 경성인들도 신문물에 들떠있었듯, 일본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그날의 조선인들은 개화를 앞둔 꽃처럼 들떠 보인다.

의도적인 즐거움은 거기까지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모호하고 이중적인 경성의 모습이 실체를 드러낸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다감해 보이지만 결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일본 주임과 조선형사 홍윤식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진실을 철저히 가릴 수도 있는 과학수사의 함정처럼. 어쩌면 이 극이 파헤치고 싶었던 것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모든 게 불확실했던 그날의 경성일지도 모른다. 

 

 

 

 

성기웅
1974년에 태어났다. 2004년, 직접 쓰고 연출한<삼등병>에서 강압적인군대 조직 안에서 갈등하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을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내며 평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후<조선 형사 홍윤식>(2007),<소설가 구보 씨의 경성 사람들>(2007) 등을 통해 일제시대와 근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아픈 역사 가운데서도 낭만을 포착해 예리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문학적 감수성과 언어적 상상력을 겸비한 극작과 섬세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연출을 선보이며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히라타 오리자의<과학하는 마음>3부작을 번역, 연출했고, 2이1년에는<과학하는 마음- 숲의 심연편>을 각색,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는 <깃븐 우리 절믄 날>(2008),<소설가 구보 씨의 1일>(2010),<다정도 병인 양하여>(2012)가 있으며 체호프의<갈매기>를 각색한 한일 합작 연극<가모메>(2013)를 쓰고 협력연출로 참가했다.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2011),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13), 두산연강예술상(2013) 등을 수상했다. 현재 극단 제12언어연극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