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서울 중산층 주거지역 안 어느 평범한 지하 카페.
이 카페에서는 단골 동네 중년 남성들이 가끔씩 만나
세상일들을 담소하며 가볍게 술잔을 나누는 곳이다.
그 인사들 중 수석이 취미인 시인 나우현은 좀 특이한 인물이다.
종종 재미삼아 앞일을 예언하곤 하는데 그 확률은 거의 100%이다.
그런데 어느 날 카페 주인이 바뀌게 된다.
새 주인 홍 마담은 카페를 새로운 방식으로 경영하기 시작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카페 고객들에게 가면을 쓰게 한 것이다.
처음에 어색하거나 거부했던 단골들은 새로운 풍습에 익숙해지면서
'익명성의 유희적 분위기에 편승하며 매우 자유롭고 흥겨운
술자리를 만들어간다. 카페는 날로 번창해간다.
어느 날. 시인 나우현은 카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한다.
그러자 홍마담과 나우현 사이에 긴장이 빚어지게 되고 급기야
살인사건은 일어나게 된다.
원작과 각색 희곡
현대 소설사에 있어서 가장 지성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이청준(1929~2008)은 그의 소설 속 <예언자>를 통해 군사정권의 개발 독재 속에서 억압적인 정치·사회적 상황과 권력 구조가 빚어낸 현실적 부조리와 모순적 구조에 대응하는 저항과 도피로서의 죽음을 형상화하였다. 이청준이 <예언자> 속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예언자적 죽음'은 사회로부터 받은 억압의 요소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결단하는 의지적 죽음이다.
'씨레네'를 인수한 카리스마적인 여성 '홍마담'은 경영혁신 차원에서 뜻밖에도 10시 이후에는 손님과 여급 모두 가면을 써야 한다는 규칙을 만든다. 가면은 왜곡된 권력의 지배와 억압, 사회 부조리와 구조적인 모순을 극대화하는 상징적 도구임을 보여준다. 이 거추장스러운 규칙에 반발하던 단골들은 언젠가부터 가면놀이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이를 즐기기까지 하는 광경을 보인다. 이같은 모습을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지켜보는 이가 바로 예언자 나우현이며, 기이한 가면 풍속이 생긴 이후로 예언을 중단함으로써 '씨레네 규칙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가짜로 가득 찬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불안 없는 삶'이라는 자유의 궁극적 형태를 추구하는 투쟁의 마당에 불필요한 억압에 대한 항거'를 대변하는 인물, 홍마담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놓고도 배반에의 예감으로 불만을 느끼고, 나우현이 근래 예언을 중단했다는 사실에 배반의 진원지가 나우현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추측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권력자와 예언자의 대립구도가 성립된다. 나우현이 오랜 침묵을 깨고 발설한 예언을 통해 두 대립구도는 떠오른다. 홍마담이 지배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급기야 손님 중 하나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예언의 내용이다. 나우현의 예언은 홍마담의 불안을 점점 더 가중시키고, 결국 홍마담은 그녀의 심리적 노예가 되어버린 우덕주를 조종해 나우현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때 나우현의 예언은 체제의 본질을 폭로하고, 실제로 살인을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사실상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이때 나우현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사회에 대항하는 강한 반동인물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의 현실과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이상적 세계 틈 사이에 자리하는 '희생양'으로 설정된다. 정치·사회적인 매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정신의 대결 관계를 다루는 <예언자> 속에 나타나는 나우현의 죽음은 새로운 삶의 문턱을 여는 '죽지 않는 죽음'이다. 새로운 삶의 문턱이란 <씨레네>로 은유되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과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순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확산되는 지점이며 이는 역사적 사회적 변혁의 힘이 된 다. 이를 통해 이청준의 소설 <예언자>는 변화된 삶의 근원에 대한 회귀를 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청준이 이 소설 <예언자>를 썼던 배경은 우리 역사의 참혹한 시기였던 유신체제였다.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며 수많은 인사들을 투옥시키고 상해하고 고문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유린하던 시기였다. 작가에게 자유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던 그때 작가는 이 상황에서 진행되는 권력과 피지배, 여론 조작과 우중화 정책, 새디즘과 매조키즘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려 한 듯하다. 그러나 송전은 원작 소설 <예언자>를 희곡 <씨레네>로 각색하면서 2023년이란 '지금'을 곱씹어 분석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성찰함으로써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연극적 서사 전략을 구사한다. 이를 위해 작품 속에는 '시대를 초월한 상수인 지배-피지배의 인간관계'란 주제 언어를 작품 전반에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뿜어내고, 사유의 비판적 질문을 끌어내고, 연극을 보는 재미와 긴장감 속에서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유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선율을 지닌 춤과 음악이 작품의 배면에 숨어있다. 특히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각색 희곡 둘 다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시공을 넘나드는 연극성과 무대와 관객과의 연결구조가 필연적인 유기체로 작용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하여 '가면'이라는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의 모순을 극대화하기 위한 '은유적 도구'로 작용한다. 게다가 순교에 가까운 나우현의 죽음은 자신의 예언을 증거하고 실현하기 위한 자기정직성의 최대치로 자리 잡는다. 작품 속 '나우현'은 '자기실현적 예언'을 통해 권력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예언이란 한낱 점치는 일 따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진실을 발설하는 일이며, 그 실현의 실현 과정 속에는 예언자 자신의 역할이 이미 포함돼 있음을 '몸'을 통해 보여준다. 예언이 동시대의 사회역사적 진리에 대한 통찰이 '실천적 행동 의지'로 체화될 때 '예언의 힘'은 '비극적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날 것이다.
가면 씌우기, 쓰기 그리고 찢기 – 각색 송전의 글
한국 소설문학을 대표하는 이청준은 1977년 「예언자」란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폭압적으로 사회를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민주주의 기본원칙인 삼권분립은 말뿐이었고 한 독재자의 발언이 곧 법이고 심판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이청준 역시 그 상황에서 권력의 린치를 당한 처지였다. 1969년에 벌어진 동백림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 이청준이 아마도 70년대의 폭력적인 유신체제의 메카니즘을 우의(寓意)로 형상화한 것이 이 작품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카페 안에서의 살인은 결국 이 카페의 폐쇄로 이질 수밖에 없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지성인의 피살로 마무리한다. 결국 그의 죽음은 다가올 현실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그의 수하(김재규 중정부장)의 총에 생을 마감했다. 소설 속 예언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었던 셈이었다. 소설은 가면이 "인간 본능 발산의 통로이고, 가면놀이는 마음 속 추악한 본능을 떳떳이 드러내는 놀이'라 규정한다. 가면의 속성이 꼭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체제로부터의 해방감, 규정으로부터의 일탈감 등이 불러 일으키는 효과는 분명한 순기능이다. 유럽 중세 때 종교적 억압에 휩싸인 대중들에게 숨통을 터주었던 사육제, 소위 하비 콕스가 말하는 '바보제'는 한 예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례적, 순간적이여야 할 뿐 일상화나 습관화되어서는 안 되는 속성이다. 소설에서 요즘 말로 '걸크러쉬'인 카페 사장 홍 마담과 문제적 고객 예언자 나우현과의 긴장관계가 긴장 축을 이루고 있다. 홍 마담처럼 요즈음 우리 사회는 누군가가 가면 쓰기를 강권하고 그래서 가면을 쓴 자들이 가면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언뜻언뜻 들기도 한다.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그리고 터무니없이 채찍을 흔들어대는 그들의 행태가 가면을 쓴 듯 너무 뻔뻔스럽기 때문이다. 연극 속의 홍 마담처럼 가면을 씌우려는 자는 누구일까? 또 기꺼이 가면을 쓰는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 가면의 이면을 읽어내어 그것을 찢어낼 수 있을까? 연극 <씨레네>는 답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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