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에밀 졸라 원작 강량원 각색 '테레즈 라캥'

clint 2024. 4. 10. 17:17

 

 

테레즈의 남편은 군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 의가사제대를 하고,

그때의 충격으로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남편의 전쟁터 친구 로랑이 그들의 집을 찾아온다.

그 역시 군대의 억압적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을 거듭하고

끝내 무국적자인 떠돌이가 되어있다.

테레즈는 로랑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느끼며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로랑의 방랑생활을 동경하여 함께 여행하기를 제안하고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

여행길에 우연히 발견한 배에 몸을 실은 세 사람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새가 울고 거대한 자연의 적막에

압도된 남편이 울음을 토해낸다.

테레즈와 로랑은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남편을 죽인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자신을 버리고 혼자 죽은 아들을 저주하며

며느리를 로랑에게 주고 자신을 부양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함께 누워 보지만

죽은 자의 마지막 울음소리에 몸서리를 친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지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저주하며 울부짖고,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아들의 사인을 깨닫고

온몸이 마비된다. 휠체어에 앉은 화석처럼 굳은 어머니 앞에서

테레즈와 그녀의 새 남편은 부둥켜안고 서로를 죽인다.

 

 

 

연인들에게 피와 심장과 욕망은 단순한 심리나 그리움이 아니다. 그것은 생리적 뜨거움의 표출이고 이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감각적 표면의 부대낌이다. 테레즈와 로랑이 제어할 수 없는 본능에 복속되어 버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던져진 정신의 위기를 어렴풋이 감지한다하지만 불쑥 찾아왔다가 떠나버릴 것만 같았던 이 위태로움은 그 둘 사이에 기이하게도 거울과도 같은 벽을 세운다. 욕망의 대상에게 자신의 정신적 위기를 동시에 투영하게 하는 이 벽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에밀 졸라는 낭만주의 이후의 욕망과 육체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방식을 보았고 그 안에서 인간행동을 끌어가는 필연적인 충동의 원리를 포착했다. 에밀 졸라는 테레즈 라캥을 자신의 사실주의 연극선언 강령을 입증하기 위해 희곡으로 개작한 것만이 아니라, 비로소 인간 이해에 대한 근대적 관점을 생리적이고 욕구하며 감각하는 인간에 대한 인정이 시작되는 지점을 마련한 것이다욕망하는 인간, 정신적 위기는 혼란함으로 감지되어 다가올 따름이며 그 위기는 다시 육체의 매몰로 이어지는 인간에 대한 투명한 진술이 바로 <테레즈 라캥>이다.

 

 

 

내가 갖고 있는 에밀 졸라의 원대본은 총 7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 블로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각색자이자 연출자인 강량원 씨는 핵심 인물 4명으로 그 규모를 줄였다. 많은 해외 희곡 번역 중 유독 에밀 졸라의 이 희곡만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나는 그 원인을 모르겠다. 프랑스를 유학해 들어온 이들도 적지 않고, 또 영문판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졸라-스트린베리의 그 라인은 입센-고골리-아서 밀러의 라인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 결과, 현대연극의 출발점과 맥을 모두 후자와 같은 일괄 사실주의의 맥으로 보고 그 시각에서 우리의 현대 서구의 연극사는 기록되면서, 또 그렇게 설명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형식적인 사회 비판적 연극만 늘었고 사회의 인간을 함께 탐구해 들어가는 연극은 희소해져 갔다. 대신 그것을 우화나 알레고리를 통해(최인훈 이강백, 오태석 등) 우회적으로만 또 삽화적으로만 다루려 한다. 보다 직접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분석적 시각을 우리 연극은 특히 현대극은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량원이 각색하고 연출한 이 공연은 보다 특별한 시각에서 평가되어야 한다의가사제대자인 까미유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테레스와 까미유의 어머니인 라캥 부인, 까미유의 군대친구인 로랑4명의 캐릭터를 쇠막대를 이용.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설계된 공간 속에서 조소적 물성과 같이 효과적으로 배치, 그 넷의 관계를 침묵과 무성 흑백영화와 같은 주기적인 암전을 곁들여 묘사해보려 한 이 공연은 얼마간 내게는 심리적 무용과 같이 시적이었고, 또 문자 그대로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경제성 때문에 상징에 더 가까웠다. 사실 재현이란 개념은 협소한 의미로 쓰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재현이 아닌 이상 더 폭넓게 쓰일 수 있다. 그래서 때론 그것은 표현에 가까워지기도 한다이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그 네 인물의 소통방식과 특히 테레즈와 로랑과의 성적관계를 가지는 장면이다. 우선 소통방식에 있어서 그들은 대부분 어색해하며 참기 힘든 침묵과 불현듯 한 신체 상호간의 접촉을 꾀한다. 특히 까미유의 어머니 라켓 부인은 마치 작은 짐승과 같이 그 같은 접촉을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또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길 좋아한다. 아들의 죽음 후 아들의 친구인 로랑의 등에 기대어 로랑과 테레즈가 나눴을 법한 애욕을 자신의 유방이나 엉덩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보며, 또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는듯한 제스처와 같은 것이 그 한 예다. 그 같은 접촉의 정점이 로랑과 테레즈의 애욕 장면이다. 무대 앞에서 다소 창백하며 찌들고 병든 듯한 얼굴표정을 한 테레즈와 누런 군복 차림의 로랑이 반복적으로 관객 앞에서 보여주는 애욕의 장면은 로랑이 지퍼를 내리는 등 과감한 행동들을. 그러나 매우 진지한 과정 속에서 반복하면서 특히 그 행동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동물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점점 그들 사이의 애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관객들로 하여금 리얼하게 느끼게끔 했다. 공연의 끝, 그 모든 것을 즉 남편의 익사까지도 그들 둘이 공모가 아닌 모두 로랑의 탓으로 돌리려는 테레즈의 항거는 그래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평론가 김유의 리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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