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해롤드 핀터 '빅토리아 역'

clint 2024. 4. 6. 10:43

 

 

콜택시 회사의 관리자가 빅토리아 역으로 손님을 맞으러 가게 하기 위해

운전사 274를 호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관리자는 자신의 사무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오로지 마이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운전사들을 호출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호출당하는 운전사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며 길거리에서 배회하는데, 

사실 자신이 어느 길에 있는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관리자가 작은 삶의 공간에 갇혀 있다면 운전사 역시 어느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혀 버려져 있기로는 매일반이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고립된 공간에 갇혀서 통하지 않는 말, 

그래서 의미 없는 말만 하는 현대인의 공간적, 정신적 고립상태를 보여준다.

 

 

 

초기의 극에서 보인 희극적 터치가 스며있는 이 극은 벙어리 웨이터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1982년 초연된 이 극은 배신 후에 두 종류의 상이한 양식 즉 기괴한 초현실주의와 형이상학적인 사실주의가 같이 나타나는 재미있는 극이다.

 그 두 사람은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명령을 내리는 상사는 오직 명령하는 말만을 통해서 부하인 운전사와의 지배 - 피지배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극 전체는 두 사람의 파워 게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파워 게임의 도구는 언어인 것이다. 호출 받은 운전사는 멍청하게 한밤중에 수정궁의 밖에 멈추어 서서 어디 가기를 거부한다. 그는 운전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빅토리아 역이 어디 있는지 모른단다. 빅토리아 역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란다. 운전사가 런던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있는 상태이다. 수정궁 근처에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관리자는 수정궁은 불타 버렸다고 한다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에서 보면 확실한 것이 없다. 어디 있는지 확실치 않을 뿐 아니라 가족이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운전사는 딸이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것도 정확하지 않다. 마지막에 운전사는 차 뒤에 사랑에 빠진 여자를 태우고 있어 못 간다고 밝히는데 관객의 눈에도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현실인지 그의 상상의 한 파편인지 모호하다. 아니면 여자를 살해해서 트렁크에 싣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비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어쨌든 핀터의 스타일에서 명확한 것은 없다.

 

 

 

 

소통의 불가능은 관리자를 미치게 한다. 그래서 관리자가 운전사 대신 마이크를 목 조르려고 몸부림치듯 연출되기도 한다. 관리자는 처음에는 운전사에게 자신의 명령이 전달되지 않자 안달하다 화를 내고 좌절하지만 뒤에 여자를 태우고 있으며 사랑에 빠졌다는 데에는 질투도 느끼고 드디어 자신이 운전사 있는 데로 가겠다고 한다. 아무리 소통이 안 되는 관계라도 관리자가 현재의 외로움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유일한 상대인 운전사와 관계를 맺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함께 휴가를 얻어 휴양지로 갈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사무실로 와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도 해보지만 어떤 시도도 이루어질 길이 없다. 마지막에 관리자가 운전사를 찾아 나서겠다고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관리자의 이러한 상황은 현대인의 불구 상황으로 빅토리아 역으로 가서 맞으려는 손님의 신체적 불구는 관리자의 정신적 불구의 모습을 상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운전사에게 빅토리아 역으로 가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기다리라고 하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극이 진행될수록 운전사는 상하 관계를 바꾸어 놓으며 관리자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려오게 한다. 무식하게 밀어붙이거나 혹은 괘념치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에게는 제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일까? 인간관계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단순히 사회 계급적 문제이기보다는 누가 더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나, 누가 더 고립을 견뎌내나, 누가 더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가와 연관되어 있음을 관객은 보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천직이라던 관리자는 자신의 파워를 잃고 운전사에게 조종당하며 절망하게 된다. 행사하는 자와 받는 자가 공존하는 파워게임에서, 조종당해야 하는 자가 이를 무시해 버리면 파워 게임에 익숙한 자는 파멸하게 된다. 그리고 조종당하던 자는 다시 조종하는 위치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극의 시작에는 조명이 부장 석에 먼저 켜지고 그가 운전사를 어디 있냐고 부른 후에 운전사의 자리에 조명이 들어오는 데 반해 극의 마지막에서는 사무실의 불이 꺼지고, 운전사가 가만히 앉아 있는 택시에 조명이 아웃되는 것으로 보여준다.

 

2002년 박정의 연출로 초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