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키 작은 남자는 키 큰 남자에게 다가가
포도주를 한잔 같이 마시자고 한다.
키 큰 남자는 피하고 싶었지만 거절하지 못한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라 키 큰 남자가 불법체류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한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은 키 작은 남자가 원하는 대로
자주 만나게 되고, 두 사람 관계는 점점 수직적으로 변해 간다.
외국인 법이 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선물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족쇄가 된 것이다.
키 작은 남자는 매사 그 힘의 칼을 일방적으로 조용히 휘둘렀고,
키 큰 남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키 작은 남자에게 순응했다.
머리로는 자신의 지식과 글쓰기 능력으로 키 작은 남자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키 큰 남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절단하지 못했다.
현실의 부당함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듯했지만,
사실은 현실에 숨어 종이 된 것이었다.
반면 키 큰 여자는 기차를 타고 현실에서 도망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의 부당함에 숨거나 멀리서 바라만 보지 않고 용감하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낸 것이다.
(이 표현은 복잡한 문제를 대담한 방법으로 풀었다는 뜻)
"여우는 아는 게 많다. 고슴도치는 중요한 것 하나만 안다."
어떤 동물들처럼, 빛으로부터 숨어서 그림자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 있다.
비밀에 부쳐진 삶을 사는 이름 없는 남녀들. 야행성동물들.
노인 병원에서 야근하는 남자, 그런 그가 불법체류자인지 아는 남자,
야근으로 뒤바뀐 생활에 불편한 그의 동거녀와 잠을 못자는 키 작은 여자...
이들 야행성 캐릭터들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모두가 숨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불신하는 데 익숙하다.
그들은 모두 밤에 어슬렁거린다. 그들은 그들 주변의 그림자가 정말
그림자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들은 야행성 동물과 닮았다.
후안 마요르가는 2002년 영국 로열 코트 극장으로부 더 짧은 희곡 쓰기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다. 국적이 다른 4명의 극작가가 각각 자국의 정치적 이슈를 10분에 담아내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외국인법 개정과 총선이 맞물려 있던 스페인은 국민이 찬성과 반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격렬하게 다투면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마요르가는 이 갈등을 계기로 서류 하나로 사람들을 시 민과 비시민,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누어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거나 박탈하는 현실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반영해 <좋은 이웃>이라는 짧은 희곡을 완성해 영국에 제출했으며, 그 다음 해인 2003년 마드리드에서는 <야행성동물>을 선보였다. 야행성 동물은 먹이를 얻거나 생존하기 위해 주로 밤에 활동하는 동물로 청각이나 후각이 발달했다. 이들이 밤에 활동하는 이유는 빛이 적어 사냥꾼이나 낮에 활동하는 포식자를 피해 쉽게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행성으로 알려진 개나 고양이처럼 꼭 밤에만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야행성이다. 키 큰 남자와 키 큰 여자, 키 작은 남자와 키 작은 여자,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한 아파트의 위층과 아래층에 살면서 계단에서 마주치기도 하는 평범한 이웃이다. 하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고, 각기 다른 이유로 밤에 깨어 있다. 마요르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문제를 선과 악, 가해 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하지 않는다. 불법 체류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며, 불법체류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괴물로 그리지도 않는다. 또한, 어떤 특수한 경우에 벌어지는 사건, 또는 스페인만 문제로 국한하지도 않는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에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법의 권리를 누구에게 어디까지 부여하느냐의 문제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인간을 서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위험을 보여 준다. 하나도 폭력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폭력을 자행하고, 폭력에 침묵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 준다. 합법이냐 불법이냐, 서류가 있느냐 없느냐의 법적 문제 이전에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아 야 하는 인간적 도리를 잊지 않기를 당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처럼 축소되고 가까워진 글로벌 시대는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되고, 인터넷 광역 통신망이 구축되면서 도래했다. 전세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나뉘어 대립했던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일부 전문가들과 군대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인터넷 통신망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수많은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어 내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경이 사라진 것 같은 지구촌 시대라고 해도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에 입국하고 체류하려면 해당 국가가 법적으로 허용한 자격을 갖추고 기간을 지켜야 한다. 허가 없이 입국하거나, 비자기간이 만료되었는데 연장하지 못하거나, 취업할 수 없는 비자인데 취업을 하는 등의 경우에는 불법체류 상태가 되어 어떤 법적 권리도 갖지 못하며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다. 심지어 발각되면 강제추방을 당하기도 한다. 따라서 불법체류자들이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결과 불법적이거나 현지인들이 힘들어 외면 하는 일자리를 갖게 되고, 저임금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열악한 근무환경을 감내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부 현지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불법체류자들의 약점을 악용하거나 범죄와 연결 짓고, 학대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편, 불법 체류 문제는 글로벌 시대 이전에는 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나라에서 주로 발생했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 경제 흐름에 따라 자본과 노동력이 전세계를 무대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경제활동이 활발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갈수록 자국민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커져서 불법 체류자들의 인간적 권리를 부여하는 정책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이는 국경의 의미가 없어진 것 같은 시대지만 동시에 국적을 증명하고 강조해야 하는, 개방주의와 보호주의, 인도주의와 법치주의 가치가 충돌하는 아이러니한 이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이민자가 많은 나라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중반까지는 내전을 치르고 독재 정권하에 있었던 지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를 비롯해 인근 유럽국가들로 이민자를 보내는 나라였으나 지금은 많은 이민자를 필요로 하는 나라, 많은 이민자가 체류하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나타난 변화로,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스페인도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줄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 유입은 스페인의 저출산, 인구감소 문제를 해결하는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한편, 이민자가 많다는 것은 불법 체류자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의 출신국가를 살펴보면 같은 유럽연합 가입국 루마니아,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거리는 멀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권인 라틴 아메리카, 그중에서도 에콰도르 출신이 많다. 특히,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온화하고 일조량이 큰 날씨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덕분에 영국이나 독일의 은퇴자도 스페인을 많이 찾는다. 이런 스페인에서 외국인 입국과 체류에 관한 규정을 처음 마련한 것은 1985년이다. 일명 '외국인 법'으로 불리는, '외국인의 권리와 자유, 사회 통합에 관한 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 법은 정부의 이민 정책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완화되기도 하지만 이민자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시선은 갈수록 곱지 않다. 불법체류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더 부정적이다. 때로는 불법체류자에게 인격과 인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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