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지의 한 극장,
아바는 이란에서 자신과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나자닌을 위한 공연을 만들고 있다.
감옥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아바의 연극에는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수감된 이들이 등장하고, 나자닌과 아바그리고 함께 수감된 여성들은
연극 <죽음과 소녀>를 준비하며 사회적 위선과 잔인함에 맞선다.
아바는 나자닌에게 '성스러운 결혼'이라는 위선적인 사회제도로 포장된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아바가 나자닌을 회상하기도하고, 과거의 기억에 잠기며
공연 연습이 한창이던 무대의 커튼은 자꾸만 삐걱거리고,
소품으로 쓰이는 단두대는 말썽에, 모르는 이로부터 전화는 자꾸만 걸려오며,
오늘따라 연습이 매끄럽지 않게 진행되는데....
'극중극'으로 구성된 공연으로 배우들은 2개의 역할을 넘나들며
무대 위에서 또 다른 무대를 만든다.
번역가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이란의 실존인물 '나자닌 데이히미
감옥 속에서도 공연을 올리고 인권과 평등을 외쳤던 그의 이야기다.
가상의 인물 '아바'를 통해 전하는 세상의 폭력적 현실 폭력의
트라우마 속에 있는 아바의 외롭고 처절한 싸움을 목격하며
동시에 그 고통 어린 삶을 감각할 순간, 복잡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가까운 현실로 안착시켜 먼나라인 이란에서의 일이
지금, 여기, 우리의 일과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감각할 것인가.
나아가 성찰과 연대에 도달할 것인가?"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는 실존인물인 故 나자닌 데이히미와 나스린 소투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1981년부터 이어져 온 강제 히잡 착용에 반대하며, 민주화와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온 이란 여성들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故 나자닌 데이히미는 2011년 이란 민주화 시위 중에 투옥된 연극학도다. 가혹한 처우로 유명한 에빈 교도소에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를 공연했다. 교도관들의 잔인한 행동에 맞서며 다른 이들과 함께 단식투쟁을 했고, 2012년 석방되었으나 연극을 공부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이내 천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극에서는 그녀는 ‘나자닌’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나스린 소투데는 인권변호사로, 2010년부터 이란 정부에 저항한 양심수들을 변호하다 투옥되고 석방되기를 반복했다. 현재에도 에빈 교도소에 재수감되어 있다. 나자닌이 옥중에서 <죽음과 소녀>를 공연했을 때 사용했던 소품을 지금까지도 보관해왔다. 그녀의 남편 역시 ‘강제 히잡 착용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연극에서 그녀는 ‘나스린’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는 이란 여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우리 일상으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 연극이 ‘극 중 극’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명지의 한 극장에서 연출가 아바는 나자닌을 위한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를 만들고 있다. 이 연극을 위해 연습하는 장면들이 작품의 주된 뼈대를 이루고 있다. 모든 배우들은 연극을 올리기 위해 연습을 하는 배우의 역할을 겸한다. 이 점 때문에 연극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는 메타연극적 속성을 띤다.
작가의 말 - 이수민
여성 인물들을 구상하면서 나는 그녀들이 무대에서 겹쳐서는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이란 인권변호사 나스린 소투데, 이란 극작가 故 나자닌 데이히미, 칠레 고문 피해자 빠올리나, 그리고 내가 만든 인물 아바는 무대 위에서 어떤 식으로든 겹쳐선 채 관객을 응시한다. 인물들이 겹치는 지점을 통해 정치· 문화·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관통하는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고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길을 걸어온 여성들이 무언가를 함께 상상하는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지점에는 한국 여성의 경험도 포함돼 있다. 2022년에 벌어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는 한국인이었지만, 그녀의 경험에는 국경과 국적을 초월한 보편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희곡을 쓰는 동안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스린, 나자닌, 빠올리나 같은 인물과 대비되는 아바를 구상해 주인공으로 세웠다. 미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매일 가정 폭력을 견디고 저항하며 살아온 아바를 정치적이지 않은 여성, 비정치범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사이 이란 소식을 들었다. 강제 히잡 착용에 반대하는 여성을 변호한 죄로 나스린 소투데는 2019년 징역 38년과 148번의 채찍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이어가던 그녀는 가택연금으로 풀려났지만, 며칠 전 고문으로 악명 높은 에빈 감옥에 다시 투옥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악화한 천식으로 고통받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부는 의료 지원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2023년 나스린이 처한 현실에 2009년 나자닌의 과거가 섬뜩하게 겹친다. 나자닌 데이히미의 사인(死因) 역시 천식이었다. 나스린의 조건 없는 석방을 촉구함과 동시에 현재에도 이어지는 이란 여성들의 목숨 건 강제 히잡 착용반대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먼 나라 이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국 배우들이 서울에 있는 극장에서 무대에 올리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란 민주화 시위와 강제 히잡 착용 반대시위에 관한 자료를 조사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늘 광주 민주화운동이 떠올랐다. 폭도로 내몰려 총에 맞고 감옥에 갇혔던 광주시민들의 간절한 바람과 에빈 감옥에 갇혀 고문을 견디는 이란 여성들의 바람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국적과 국경을 초월하는 목소리가 가진 힘을 나는 믿는다. 외부의 목소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이 희곡은 2023년 여름 뉴욕 iati 극장에서 주관하는 작품개발 워크숍과 낭독극을 거친 결과이기도 하다. 부족한 글을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동료 작가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어 준 남인우 연출과 배우들, 스태프, 드라마터그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훌륭한 배우들의 숨과 몸짓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모두 내 글이 미숙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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