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문정연 '황천기담'

clint 2024. 3. 23. 19:28

 

 

 

황천 강가. 온갖 죽은 것들이 모이는 곳. 눈앞엔 다만 황천강이 흐른다. 벽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책장이다. 책은 빼곡하게 꽂혀 있다. 온갖 인간들의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운명이 적힌 인간들의 운명책이다. 남자는 오늘도 황천강의 선녀를 유혹해 운명이야기를 읽어 달라 조른다. 남자는 살아있는 인간이라 저승의 운명책을 읽지 못한다. 죽은 후에나 알게 될 온갖 운명이야기를 듣는, 살아있는 이 남자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팔아 살아가는 3류소설가다. 그러나 남자의 진짜 관심은 언제나 하나, 바로 자신의 운명이다. 선녀는 기어코 본인의 운명을 알고자 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비웃으면서도 남자와 놀아나는 것이 흥겨워 못 이기는 척 남자의 운명을 읽어주는데...

 

황천강 수레꾼이 오늘도 죽은 인간을 싣고 황천강가로 온다. 상여를 닮은 수레에는 방금 죽은 여자가 타고 있다. 그런데 죽은 여자의 몸에 거대하게 불어터진 뭔가가 붙어있다. 그것은 원한이다. 여자가 떼어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달고 온 이승의 원한이 달싹 붙어있는 것이다. 선녀는 상사병으로 죽은 여자를 놀려대고 황천강 수레꾼은 여자를 위로하며 부디 49일 후 저승 가는 배를 탈 때는 그 원한을 뚝 떼어내라고 말해준다. 여자는 꼭 그러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나 여자가 홀로 남았을 때,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며 잠을 깨는 원한은 실패한 사랑을 기억하고 버려진 절망을 되새기며 여자를 괴롭힌다. 여자는 이제 다 잊고 편안해지고 싶다. 여자는 원한을 떼어버릴 것을 다시 결심한다.

 

남자는 오늘도 저승 언덕을 넘어와 책장 앞을 서성이며 선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언덕을 넘어 이승으로 도망을 치려던 원한과 마주친다. 원한은 자신을 무참히 버린 남자를 알아보고 놀라지만 남자는 원한을 알아보지 못한 채 운명책을 읽어달라 부탁한다. 원한은 남자를 증오하고 또 사랑했던 감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남자의 운명책을 읽는다. 그러다 자신과 얽힌 부분이 나오자 미친 듯 화를 내며 운명책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남자는 두려움에 빠지지만 곧 원한의 거침없는 행동에 동요된다. 남자는 원한과 공모하여 자신의 운명을 원하는 대로 바꾸고 원한은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남자의 운명책을 바꿔 쓴다. 남자는 원한에게 점점 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승의 남자와 그를 좋아했던 황청강을 건널 여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작가 : 문정연

극작가. 발표작으로 <사육제>, <매혹>, <단 한 번과 두 번>, <도화골 음란소녀 청이>, <나는 거위>, <넌 가끔 내 생각을 하지 나는 가끔 딴 생각을 해>(뮤지컬), <광화문 연가>(뮤지컬), <뒤돌아보는 사랑 - 오르페오>(댄스 뮤지컬), <강아지똥>(발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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