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이 준비한 제66회 공연으로 국립극장 개관기념공연이기도 한 이 공연은 전 2부 15장으로 구성된 성웅 이순신이다. 이 작품은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린 창작극으로 대형무대에서 어떻게 형상화되었느냐 하는 점에서 개념과 기술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던 공연이다. 출연진만 240여명에 이르는 무대로 당시 한국 연극사상 최대규모의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제1부 제1장 어전회의(별전, 1597 선조 30년 2월)
왜군 첩자의 농간과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서인들의 심한 탄핵을 받고,
선조는 이순신의 체포령을 내린다.
제1부 제2장 국문(행형장, 동 3월)
위관의 국문에 이순신은 괴로울뿐 심한 고문만은 면하고 하옥된다.
제1부 제3장 옥중에서(옥중, 동 4월)
옥중의 이순신은 전세만이 궁금하다. 유성룡의 전인이 찾아와 위로하나
이순신은 우울하기만 하다.
제1부 제4장 어전(어전, 동 4월)
이순신에 대한 모함은 계속되나 정탁의 신구차로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백의종군의 특사를 받는다.
제1부 제5장 백의종군(마을어귀, 동 4월)
백의종군 길에 이순신은 노모별세의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나는 이순신.
제1부 제6장 원균(한산도, 동 7월)
연일 주지육림의 연회로 나날을 보내는 원균. 군졸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싸울
의욕을 잃는다. 결국 원균은 무참히 대패, 도주하다 왜군의 손에 전사한다.
제1부 제7장 새통제사(구례초계, 동 8월)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에게 패전수군이 인계되었으나,
분연히 출정할 것을 결심.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한다.
제2부 제1장 벽파진(벽파정, 동 9월)
이순신이 준비해 두었던 모든 기지, 군량, 전선은 없어지고
황량한 폐허의 벽파진, 이순신은 피난선을 끌어 모아 새로운 작전계획을 세운다.
제2부 제2장 명량해전(왜진과 장선, 동 9월)
12척 뿐인 이순신의 전선에 비해 200여척의 마다시 대함대가 이순신의 전선에 의해 대패한다.
제2부 제4장 통곡(우수영, 동 10월)
아산에 있던 아들 면의 무참한 죽음을 들은 이순신은 피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 슬픔이 백성 전체의 것이기에 슬픔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다.
제2부 제5장 다시 운주당에서(고금도, 1598, 선조 37년 10월)
명 제독 진린이 원군으로 와서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다.
그러나 그는 豊臣秀吉이 죽었다는 소식에 물러가는 왜병을 곱게 보내주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제2부 제6장 마지막 해전(대장선, 동 11월)
최후발악을 하는 왜선 500여척과 대접전을 벌려 크게 이기나,
이 싸움에서 적의 유탄에 맞은 이순신은 자기의 죽음을 발설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한다.
작가의 글 - 이재현
「조심스런 성웅의 극화」
作品에 여러 미흡한 점을 바로 잡아주신 李殷相 선생님께 感謝드리며 오랜 기간 공연에 몰두하여준 전스타프, 캐스트에 感謝드린다. (중략) 이번 作品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부담을 주었다. 성웅의 劇化란 항상 조심스러운 진통을 수반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그 어른을 어떠한 각도에서 어떻게 形象化하여 오늘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것인가에 苦心하지 않을 수 없었다. 暴君의 劇化라면 차라리 수월하겠지만 그 어른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聖雄으로서 너무나도 完壁하시다. 거룩하신 그분의 偉業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앉아 많은 記錄을 取捨하여 무엇보다 事実을 그대로 극화하는데 努力하였다. 拙作으로 그 어른의 한면이나마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더한 다행이 없겠다.
연극 비평
2시간에 걸친 <聖雄 李舜臣>의 熱演이 끝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한 原因은 우선 劇作家가 李舜臣과의 만남을 削造的 感性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史家의 認識方法올 빌리려 한 데서 온 것이다. 그래서 言語는 무대에만 머물고 狀況은 過去에서 한 발도 우리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나는 李舜臣을 그림에 있어서 <亂中日記>에서 나타난 人間 李舜臣에의 감동이 이 드라마의 기둥(作家의 精神的 內面에 있어서도)을 이루어야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國民 모두에게 그 대강은 상식으로 알려져 있는 史實일 바에야 그것의 經過的 並列에의 力點은 더욱 徒勞이다. 李舜臣을 當時의 外的 狀況 속에서 파악하려 할 것이 아니라 내적 卞辩속에 비친 상황으로 視角을 바꾸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李舜臣과 劇作家 李在賢과의 만남은 직접적이 되고 따라서 나와 李舜臣과의 만남도 時空을 초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人間의 모습을 外的 狀況의 視角에서 파악하려 할 때 그 深度에는 限界가 있는 것이다. 그 人間의 視角에서 外的 狀況올 보려할 때 참모습이 드러난다. <聖雄 李舜臣>에서 劇作家가 이 視角에 서 있었더라면 그는 史實에 충실하면서도 훨씬 自由스러웠을는지 모른다. 심지어 나는 亂中日記에 기록된 李舜臣의 꿈을 主軸으로 드라마를 構築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하고 막연하게 想像도 해본다. 꿈의 記錄이 너무도 李舜臣의 人間的인 면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꿈 얘기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얼마나 人間的인가. 그리고 亂中日記에 記錄된 李舜臣의 꿈은 어쩌면 그렇게도 人間的으로 약하고 想像力에 넘쳐 있고, 그리고 얼마나 엄청 나게 啓示的인가. 더욱이 李舜臣의 꿈은 國難 中의 중요한 모멘트마다 늘 啓示的 役割을 하였다. 나는 李舜臣의 꿈을 통하여 그의 凡人性과 偉大性, 天才性을 보았었다. 勿論 이 꿈 얘기는 전혀 한 劇作家로서의 나의 即興的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아무튼 <聖雄 李舜臣>에서 나는 史賞과의 對決에서 敗北한 한 劇作家의 모습을 보았다. 이 敗北에는 새 國立劇場의 광활한 舞臺와 메커니즘의 展示的 利用効果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구도 크든 작든 작용했으리라는 짐작 이 適中한다면 劇作家 李在賢은 새 무대와의 對決에서 또 하나의 敗北를 맛 본 셈이다. 이 두 가지 뜻의 敗北는 歷史의 人物과 對決할때, 그리고 새 國立劇場 舞臺를 假想하며 劇作할 때 많은 劇作家들이 장차 자주 비숫한 敗北를 되풀이할는지도 모를 하나의 모델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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