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서윤미 '릴리를 위하여'

clint 2023. 12. 13. 20:04

 

 

 

오늘도 여전히 할 일이 없는 그는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며 기다린다. 손녀를? 아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현대의학의 발달은 노인의 생명을 가능한 최대한 연장시킨다. 연장된 삶은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없는 병옥은 언제나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이따금 도저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때는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살짝 뿌리거나, 설탕과 소금을 뿌리거나 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며 심장 떨림을 느껴 보기도 했는데... 그날은 특별히 과감해져서 껌을 뱉었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도 방문하지 않던 병옥의 아파트 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드린다.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빨리 뛰는 것은 처음이다. 누구일까. 지금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조재희 29세 근처에 사는 아가씨다. 왜 껌을 뱉냐고, 오늘 면접에 가는데 떨어지면 책임지란다. 그리고 며칠 후, 떨어졌다고 찾아왔다. 영화 보조작가 응모에. 그래서 작가관련 일로 얘기가 이어지며 노인은 자신도 구상한 거 정리할 게 있다며 자신의 보조작가로 일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알바보다는 좋은 조건으로 이 집에 출퇴근하게 된다.

 

81세의 할 일 없는 노인 병옥은 서울 시내의 오래된, 그러나 고가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었을 나이지만 유복했던 탓에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절망감을 맛보지 않은 운 좋은 사내다. 20대에 영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며 당대 패션의 아이콘인 비틀즈에 열광했고, 영미문학에 심취했으며, 템즈강에 앉아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시를 썼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문과 교수이자 영미권 서적 및 영화 번역가가 되어 특별한 성과도, 특별한 불명예도 없이 정년 퇴임했다. 현재는 비생산적이고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간경화 말기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간경화 말기 환자라고 해도 노인인지라 그의 일상생활은 여전히 무료하다. 노인은 간마저도 늙어서 망가져 가는 것에도 추진력이 없다. 이따금 복수가 차오르면 손녀가 병원에 입원을 시킨다. 주말에만 방문하는 바쁘고 잘나가는 손녀는 병옥이 만남을 가지는 유일한 사람이다. 응급실을 거쳐 일주일 정도 입원한 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그는 자신의 자리인 갈색 소파로 돌아와 앉는다. 집안 곳곳엔 병옥이 무료함을 달래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잡다하고, 편의적인 물건들과 병옥이 주워 온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는 요양원이 아닌 이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그는 언제나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

 

잔잔한 감동을 주며 노인문제와 젠더 문제, 그리고 두사람의 우정과 릴리에 얽힌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작품을 다 읽고나면 <릴리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작가 서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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