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동진 '알비장'

clint 2023. 11. 14. 17:05

 

 

 

「배비장전」은 원래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편으로 우리 선인들의 갈채를 받았던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후에 소설로 정착되어서는 많은 독자층의 애호를 받았고, 근래에는 「살짜기옵서예」와 같은 뮤지컬 드라마로 각색되어 여러차례 공연되는 등 현대 무대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살아있는 古典으로서의 가치를 재삼 입증한 작품이기도 하다. 흔히 「배비장전」은 절개를 자랑하던 남성이 여인의 미색(美色)을 이겨내느냐, 굴하느냐 하는 소재를 재미있게 극화한 작품이다. 우리 선인들은 특히 이런 소재를 좋아해서 저 三國遺事에도 「노힐부득 달달 박박」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양녕대군· 황진이 등의 전설을 비롯하여 「지봉전」 「오유란전」 등의 고대소설도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 「배비장전」은 위선적인 인간 또는 지배층에 대한 풍자를 그 주제로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전편에 걸쳐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은 방자와 애랑인데, 이 두 인물은 모두 서민이다. 그리므로, 방자와 애랑에 의해 풍자당하고 있는 배비장은 위선적인 인간일 수도 있고, 천민들의 원망의 대상인 지배층을 대표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배비장이 지배층의 인물이기때문에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지배증인 제주목사는 왜 풍자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배비장의 봉욕(逢辱)을 계획하고 지시하는 인물로 형상화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 배비장이 윤리의 틀을 고집하는 위선적인 인간이기때문에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이 작품은 윤리의 틀을 깨고 인간의 性情이 자유롭게 발산되는 세계를 그리고자 한 작품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의문을 두고, 「배비장전」의 서두와 결말의 구조를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응하는 사건이 드러난다. 하나는 배비장이 첫 벼슬길을 올라 제주에서 현감으로 승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울에서 부인과 이별한 배비장이 제주에서 애랑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2개의 사건이면서, 배비장에게 있어서는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다. , 서울에서 하릴없이 소일하던 배선달이 제주라는 미지의 동경의 대상이던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그 새로운 세계는 풍물만 다를 뿐 아니라 배비장으로서는 처음 대하는 官人사회이며 또한 부인이 아닌 새 여성을 만나 결연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상응하는 두 사건의 핵심은 배선달의 출임(出仕) 곧 관인사회에로의 입사(initi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배비장이 당하는 고난과 봉욕은 조선조에 유행하던 신참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새로 관인의 길을 걷게 된 배비장이 가혹한 신참례를 겪은 연후에 현감으로 승진하는 과정을 적라나하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배비장전」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女色은 관인들의 비리와 아합 그리고 치부를 대유(代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패된 관인사회에서 여색을 멀리하는 자는 윤리의 틀을 고집하는 자라기보다 동료들과의 야합을, 또는 공생을 거부하는 자이다. 배비장은 신참으로서 이러한 관인들의 관습을 거부한 셈이나, 개가 되기도 하고, 자루 속의 거문고가 되기도 하고, 업체 속의 귀신이 되기도 하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東軒 마당에서 헤엄 치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는 가혹한 참례(參禮)을 겪은 뒤에야 한몫을 하는(?) 관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비장전」은 신참례에 의한 관인들의 야입상을 소재로 하여 관인사회 일반을 풍자한 작품이며, 신참례가 지닌 위하와 오락의 기능 때문에 날카로운 웃음의 긴장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작가 이동진이 이 작품을 그 특유의 요설과 기지로써 재창조한 것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자를 것은 자르고, 벨 것은 베어 버렸다. 그리고 거의 전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의 요설은 작품의 전면에 걸쳐 날카롭고 또 부드러운 웃음을 유발시킨다. 현대적인 안목으로써 주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소재를 보다 압축시킨 「알비장」은 「배비장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알비장」은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웃음을,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슬픔 새삼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마음껏 웃고 깊이 생각해야 할 「비장」의 무대를 펼친다. (19792월 극단 민예극장. 허규 연출)

 

 

 

작가의 글 이동진(李東震: 극작가·시인)

우리 가운데 널리 알려진 「배비장전」은 지금까지 여러사람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안다. 그것을 새삼 내가 희곡화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이렇다 하고 크게 내세울만 한 각별한 동기는 없다. 다만 주일대사관에 근무하던 중 심심하던 차에 우연히 다시 읽게 된 「배비장」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번 손을 대볼까 마음먹은 일이 있을 뿐이다. 하기야 그때 나는 우리 고전의 원형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 어렵고 또 낮선 측면이 많다는 점이 아쉬웠고, 한편으로는 등장인물이 아주 평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문학작품에 대한 절실한 기대감이 충족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래서 원작이 지니는 "말의 재미"와 구성상의 핵심은 그대로 살리면서, 현재의 우리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작품으로 재구성하고 인물의 평면성도 타파하여 보려고 했다. 그리고 초점을 등장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내기"에 두려고 했다. 사실 배비장이 절개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하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작이 의도하는 초점도 거기 있지는 않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비장의 탈선 미수(?)에 시선을 맞추다 보면 이 작품은 별로 재미없는 작품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古典에서는 특히말의 재미가 두드러진다. 古事, 속담, 명언 등의 나열이 지금의 시각으로 보여 불필요 하고 무의미한듯도 보이지만 역시 그것은 그 나름대로 맛과 멋이 있을 것이다. 이 전통이 오늘날의 작품에서는 일반적으로 결여된 듯 보이는 게 안타깝다. 나는 가능한대로 앞으로의 작품 속에서 이말의 재미"를 추구해볼 작정이다. 이 희곡은 1973 10 20일 및 21일의 이틀 사이에 씌어졌다. 너무 많이 알려진 내용을 막상 재구성하려고 보니 애로가 많았지만, 되도록이면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창작하는 기분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등장인물도 단순화시켜 그 단순성 속에서 깊이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나의 노력과 시도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형성화 되었는지 시간을 두고 볼 일이지만, 독자 또는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기만 바랄 뿐이다.

 

작가 이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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