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성기웅 '다정도 병인 양하여'

clint 2023. 10. 10. 17:46

 

다중연애를 하는 '다정'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나'(성기웅)의 이야기다.

제목은 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의 시조 '다정가'의 '다정(多情)도 병(炳)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에서 따왔다.

'다정'을 '여러 애정을 가진', 즉 폴리 아모리(Poly-amory; 다자간 연애)로 해석했다.
"'어떤 장소에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누군가가 나와 말을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한 연극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성씨가 무대에 올라와 극장 안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 연극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극은 시작된다. 성씨가 주인공이지만 직접 자신을 연기하지는 않는다. 성씨의 후배이자 그를 닮은 연극배우 이화룡이 성기웅를 연기한다. 성씨는 변사 또는 해설자 역으로 개입한다. 극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다. 극 초반 성씨가 극이 끝난 후에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밝히지 않는 게 관람에 좋을 것이라고 밝혔듯, 관객들은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평소 1대 1 연애와 결혼 제도에 대해 회의를 품고있던 성기웅이 여러 남자와 다중 연애를 즐긴다는 독특한 여자 다정을 만나 그녀의 세 번째 애인이 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정의 다중연애는 기대와는 달리 불안정하고 비논리적인 것이어서 성기웅은 혼란을 겪는다. 결국 다정의 첫 번째 애인 혹은 유일한 애인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자신의 찌질함과 유치함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다정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던 연극은 결국 성기웅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된다. 성기웅은 다정에 대한 연극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에 허락을 구하는 과정을 휴대폰에 녹음한다. 그녀와 주고 받은 휴대폰 메시지가 훗날 자신의 작품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 워드로 옮겨적었던 부분이 겹쳐진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이나 다정 자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다정을 사랑하는 제 자신을 더 사랑한 성기웅은 끝까지 그러한 면모를 보인다. 다정 역시 성기웅에게 자신과 연애한 사람 중 가장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일갈한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인 듯한 내용으로 공감을 자아내는 성씨의 연출이 일품이다. 다정은 극중에서 성기웅에게 마치 자신과의 연애를 게임 즐기듯 한다고 화를 낸다. 이 말은 실제 연출가 성기웅이 이번 연극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공연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기존의 공연과 달리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들이 겹겹이다.
독일의 시인 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원리를 따르며 끊임없이 '거리두기'를 실현코자 하는 이 연극에서 성씨를 비롯한 배우들이 공연 속 인물과 실제 자신을 넘나들며 연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토론과 PT 등의 보조 장치와 독립된 서사를 가진 에피소드가 나열된 구조, 연극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축인 탱고는 관람에 또 다른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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