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원석 '변태'

clint 2023. 10. 9. 14:07

 

 

무대는 객석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조그만 도서대여점이다.

벽면이 없이 탁 트인 공간에 울타리처럼 선반이 연결이 되어 군데군데 책을 올려놓았다.

무대중앙바닥 여기저기에 낮은 책꽂이와 차곡차곡 꽂힌

서양화전집을 비롯해 문학전집과 시집, 그리고 여러 종류의 책이 보인다.

오른편 벽면과 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책을 쌓아놓았고,

왼쪽 등퇴장 로로 들어오면 정면의 도서대여점의 입구가 있어,

바닥에 깔린 작은 보료를 밟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있다.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고, 무대 왼쪽 객석 가까이에 작은 탁자와 의자가 있고,

기타가 한 개를 기대어 놓았다. 중앙의 낮은 책꽂이 위에는 한사람이 누울 정도의 공간에

컴퓨터가 놓여있고, 돌려놓았지만 아마 CD 꽂이인 듯싶다.

 

 

 

연극이 시작되면 도서대여점 주인인 시인에게 부근 정육점 주인이 자신의 시를 읊은 후 평과 함께 시 강의를 듣는다. 정육점주인은 아버지대로부터 육 곡간을 해, 소시 적부터 고기를 저미고 썰고 분리하는 일을 해왔으며, 50대가 되자, 자신의 작업을 글로 쓰면서 시작(詩作)을 하게 되고, 마침 한동네 거주하는 국문과 출신이자 등단시인인 도서대여점 주인에게 시작에 관한 지도를 받는다. 정육점 주인은 시집을 내기를 원하고, 도서대여점 주인도 동의를 한다. 도서대여점 주인은 기왕에 시집을 내려면 등단을 한 다음 시집을 내도록 하자며, 권위 있는 시 전문출판사와 평론가 몇 사람을 소개해 주기로 약속한다. 정육점 주인은 감사의 표시로 금일봉을 카페 주인에게 쥐어준다. 그때 학원선생노릇을 하는 시인의 부인이 등장한다. 정육점 주인의 시집발간과 등단 계획을 들은 부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며, 등단을 아니 해도 시집을 낸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며, 와인이나 마시자고 한다. 세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른다. 그러면서 문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현실적인 이야기, 도서대여점을 하면서 월세 돈도 제 때에 내지 못하는 남편이 시인의 길을 가기보다는 차라리 소 도살장 같은 곳에 취직을 하는 편이 생활에 훨씬 도움이 되리라는 부인의 넋두리가 계속된다. 장면이 바뀌면 도서대여점에서 홀로 있는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정육점 주인의 시가 등단이 되었고,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시집 출판을 하겠다는 전화다. 그때 도살장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닷새 만에 일자리를 포기한 도서대여 점 주인이 들어온다. 부인은 정육점 주인의 시인등단과 시집출판소식을 남편에게 전한다. 남편은 놀라며 폭소를 터뜨린다. 사실 정육점주인의 시는 시인들의 시어(詩語)라든가 문장과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고기를 썰며, 살점이 흩어지고, 피가 튕기고 하는 작업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뿐이기에 등단시인으로서는 어이없어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시적언어나 현학적 표현보다 직설적이고 평 이한 표현을 대중이 받아들이고 선호함을 어쩌랴? 부인은 남편에게 포르노 사이트 좀 그만보고 시집을 내라며 닦달을 한다. 남편은 부인의 소리에 화를 버럭 내며 밖으로 나간다. 그때 정육점 주인이 원고를 들고 도서대여점으로 들어온다. 부인은 정육점주인에게 시집을 내지 말고 육필원고를 자신에게 맡기면 직접 시집을 내주겠다며 그의 원고를 맡아둔다. 그리고 기타를 배우라고 권한다. 정육점 주인은 고기를 썰던 손으로 기타가 웬 말이냐고 펄쩍 뛰지만, 고기를 다루는 재주 있는 손이니 기타도 금세 배울 것이니, 염려 말라고 부추긴다. 부인은 무능한 시인인 남편과 경제적인 능력이 확실한 정육점 주인을 비교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을 정육점 주인에게 기울인다. 장면이 바뀌면 정육점주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TV방송국에서 정육점 주인인 새로 등단한 시인과 인터뷰를 한다는 내용이다. 남편이 들어와 부인에게 그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폭소를 터뜨리지만, 한편으로는 순수문예가 퇴조하고 대중문학이 밀리언셀러로 부상하는 현실에 마음이 오그라들 뿐이다. 부인은 남편에게 시집을 내라며 닦달을 하고 종당에는 집에서 나가살라며 소리를 지른다. 남편도 버럭 화를 내며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때 등단시인이 된 정육점 주인이 부인을 찾아와 도서대여점을 자신의 문학 동호회 모임장소인 북 카페로 사용을 하겠다며 일체의 비용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부인이 문학 동호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기왕에 몸과 마음을 정육점 주인에게 기울인 부인이 그 청을 거절할 리가 없다. 장면이 바뀌면 도서대여점 부부는 결국 법정에서 합의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대단원은 북 카페로 바뀐 도서대여점자리에서, 기타를 배운 정육점 주인의 자작시 낭송과 연주가 시작되고, 성황을 이룬 회원들의 갈채 속에서 문학 동호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정육점 주인이, 문학회회장인 부인을 연회장으로 정중히 초대하면서 먼저 퇴장을 하면, 북 카페에 홀로 남은 부인이 온몸을 뒤흔들며 추는 춤의 율동이 한동안 계속되면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변태’(최원석 작)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성인 또는 예술인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 점차 소멸해가는 도서대여점의 운명에 빗대어 적나라하게 그린다. 제목과 다소 선정적인 포스터에서 연상되는 ‘정상적이지 않은 성욕이나 행위’를 다룬 연극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극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삶의 틀을 깨고 ‘변태’해 살아남는 인간의 슬픔과, 기존의 사고와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라지는 인간의 절망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보여준다. 효석의 경제적 무능력에 절망하면서도 힘겹게 삶을 유지하던 소영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남편에게 가끔씩 들러 취미생활로 시를 배우며 용돈을 쥐어주던 동네 정육점 주인 오동탁의 ‘변태’다. 속물근성이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간직한 오동탁이 ‘고기를 썰며’란 시로 등단을 하고 그가 낸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소영은 마침내 폭발한다. 허물을 벗어던지고 자기 파괴의 형태로 광기를 발산한다. 극은 열정과 냉정, 따스함과 차가움을 오가며 때로는 웃음을 유발하고 때로는 소름을 돋게 한다. 포르노를 보는 고상한 시인 효석을 통해 예술과 인문학의 가치에 대해 길게 설교를 늘어놓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의 미덕이자 객석의 공감대를 얻어내는 힘이다.

 

 

 

 

 

예술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성과만을 중시하는 요즘, 예술의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최첨단 시대,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를 안겨주지 않는 예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연극 ‘변태’는 이에 대한 의문과 해답을 동시에 알려주는 작품이다. 연극 그 자체로 예술의 기능을 치열하게 탐색할 뿐만 아니라 가려져 있던 인문학적 가치의 회복에 대해 말하는 ‘변태’는 관객들에게 뚜렷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작품은 시인으로 상징되는 한 예술가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린다. 도서 대여점 ‘책사랑’을 운영하는 시인 민효석과 그의 아내 한소영이 동네 정육점 사장 오동탁이 등단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과정을 씁쓸하게 지켜보며, 그 안에서 겪게 되는 내·외적 갈등을 담아냈다. ‘시’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만큼, 연극 내에 대사처럼 등장하는 여러 편의 시는 극적 효과를 높인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로 시작하는 박정대 시인의 ‘음악들’을 비롯해 ‘너를 만지기보다 나를 만지기에 좋다’로 운을 떼는 김이듬 시인의 ‘지금은 자위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등은 강렬한 시어(詩語)로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극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저마다 ‘변태’, 즉 탈바꿈의 과정을 겪는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살았던 민효석은 삶의 곤궁함을 잊기 위해 포르노에 빠져들며, 비정규직 글쓰기 강사 한소영은 남편 민효석의 경제적 무능력에 힘겨워하다가 정육점 사장이 습작 시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타락한다. 돈은 많지만 자신의 지적 수준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오동탁은 민효석과 시 공부를 하다가 등단까지 하는 등 예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누리게 된다. 지성인 민효석의 삶이 이토록 비참해진 이유는 사람들이 시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인문학과 예술을 찬밥 취급하는 탓이다. 월세도 내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하는 도서 대여점의 책을 처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민효석은 “책 1kg에 100원”이라는 답변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책 속에는 작가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시집의 가치가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소영은 여전히 무균실에 갇혀 현실 모르는 소리를 내뱉는 남편에게 “당신의 시집은 네가 싼 똥일 뿐”이라며 “재활용 휴지로 만들어지는 것에 감사하라”고 일갈한다. 더불어 이 작품은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너무도 쉽게 재단하는 시대에 대한 비판까지 덧댄다. 경제적 빈곤에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마저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 민효석 부부는 결국 이혼을 택한다. 재판을 맡은 판사는 각자의 주민등록번호는 무엇인지, 이혼 사유가 성격차이가 맞는지, 위자료에 관한 부분은 합의된 것인지,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뒤 재빨리 두 사람의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짓는다. 10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산 부부의 삶은 판사의 단 몇 마디로 종지부를 찍고, 민효석은 “이대로 갈 수는 없다”며 법정에서 울부짖는다.
‘변태’는 관객들에게 극 속의 인물들이 변태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이 안에는 그저 과거와 다른 탈바꿈만 있을 뿐, 바람직한 변태와 바람직하지 않은 변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지켜본 관객은 지금 자신이 어떤 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지, 예술의 영역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자본이 파고드는 시대에 과연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이 밥 먹여 주냐?’는 의문에 대한 이 연극의 답변이다.

 

 

최원석

 

 

최원석은 1993년 2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극단 서울연극앙상블 동인으로 4년간 활동하였으며, 1997년부터 2003년 4월까지는 국립극단 전속연기자로 활발한 연기활동과 더불어 다수의 연출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연출가 겸 연기자이다. 그동안 [보이첵] [굿모닝 솔로몬] [장엄한 예식] [갱스터 파라다이스] 등을 연출했으며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우루왕] [바아냐 아저씨] [페드라] [생일파티] [숲귀신] [오이디푸스] 등의 연극에서 연기했으며 영화 [천년호] [시실리 2km] [거북이 달린다] 등에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