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치언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clint 2023. 10. 7. 17:56

 

 

연두식은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다가 국가정보기관에 붙잡히게 된다.

시인인 연두식은 그날 한강에 대한 장 시를 탈고한 상태였다.

누구도 축하해주지 않는 시 탈고를 혼자 축하하고 싶었지만,

좌익분자 연두식과 이름이 단지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혹독한 심문과 취조를 받게 된다.

그 날 영동교에는 연두식 혼자가 아니었다.
반정부운동의 조직책인 검은바바리남자와 흰바바리여자가 있었고

우산 없는 남자도 있었다. 바바리남녀는 반정부운동의 또 다른 조직책과

접선하기 위해 영동교에 나갔었고, 우산 없는 남자로 불리는 깡패는

다른 조폭과 협상을 맺기 위해 영동교에 나갔었다.

바바리남녀와 우산 없는 남자는 각자의 암호를 사용하여

또 연두식은 시상에 사로잡혀 그들의 대화는 점점 아귀가 맞아 들어가고

그만 서로의 정체를 오인하게 된다.

 

 

 

 


한편 주현미라 불리는 밤무대 가수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필연남과

밤무대 업소 사장의 비서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업소에서는 그녀에게 “비 내리는 영동교”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보초를 서고 있는 두 군인이 있다. 후임은 선임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

연두식의 선배인 소외남은 문학상 상금을 타려 하지만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다.

이들은 모두 각자 다른 목적의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곳으로 전화가 걸리거나 통화가 되더라도 소통하지 못한다.

때론 거짓된 전화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한다. 연두식과 소외남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주현미는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그러나 오해는 계속되어 이제는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고 만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 받는 어떤 삼류시인 연두식을 통하여 왜곡된 권력과 시스템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그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름’을 이용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름’이 혼돈을 야기했을 경우에 자신의 존재 역시 의심받게 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존재’ 역시 증명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인간이 타인에게 있어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시인 연두식이 결국에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코믹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력의 폭력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냥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이 시대가 그려야 할 진정한 비극이 되는 것이다. 이작품은 등장인물의 관계부터 모든 공간에 이르기까지 억압(질문)하는 자와 억압(질문)받는 자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의 얽히고 섞인 관계는 전화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모든 인물의 구조는 ‘형사-연두식/ 질문남, 필연남-주현미/ 고참-졸병/ 사무원-소외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처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전화라는 매개를 이용하게 된다. 전화는 아예 잘못 걸린 경우와 의도적으로 잘못 건 경우, 마지막으로 맞게 걸고 맞게 받았으나 서로의 상황 때문에 전혀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없는 경우 세 가지에서 사용된다. 결국 전화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본인이 거짓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존재를 확인 받게 되고, 본인이 진실을 이야기하면 존재를 의심받는 등 현대 사회에 만연한 의사소통 능력 상실을 보여주는 기제로 활용된다.

 

 

 

 

최치언
1970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시화집 『레몬트리』 외에 희곡 『코리아환타지』 『밤비내리는영동교를홀로걷는이마음』 『충분히애도되지못한슬픔』 『언니들』등을 집필하였으며 극작가 및 총체극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희곡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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