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진아 '그녀를 축복하다'

clint 2023. 10. 3. 09:45

 

〈그녀를 축복하다〉(2006)는 짧고 명쾌하고 즐겁다. 비록 〈지고지순〉에서처럼 성이 적나라하게 전면에 노출되지는 않지만 여성의 욕망에 대해 이처럼 솔직하고 생명력 넘치게 쓴 희곡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2006년의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의 공연이 타 공연에 비해 희곡의 매력을 잘 살려준 까닭도 있을 것이다.

줄거리는 삼십 후반의 주부인 선여가 춤 선생과 바람이 나지만 결국 남편 곁에 머문다는 식으로 다소 보수성을 띤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젊고 싱싱한 애인을 향 한 선여의 욕망을 역시 일인칭의 화법으로, 그러나 전작보다 더 낭만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그러나 더 상큼하고 발랄하게 그려낸다. 그 중 백미는 선여가 남편과 애인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자리 배치하는 장면과, 남편과 애인, 그리고 선여가 집 앞 가로등 밑에서 "맞아야 할 사람이 때리고 때려야 할 사람이 포옹을 하는” 귀여운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일 것이다.

 

 

 

극이 시작되면 거의 속치마 차림의 한 여자가 무대 위를 양쪽으로 뛰어다닌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에서처럼 벽에 몸을 부딪히며 자신을 못 견뎌하던 그는

난간으로 뛰어올라 외친다. 그리고 노래한다.

"나는 봄비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는 현수를 좋아합니다. 봄비가 내리는 날 현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이는 삼십 대 주부 선여. 학원의 젊은 춤 선생 현수와 바람이 났다.

남편과 함께 한 과거와 아이들이 자라나는 미래를 생각하며 가정으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연극은 '불륜의 사랑' 이야기로 쓰여 지지 않았다.

연극은 제도적 삶의 안온함에 반기를 드는 자유로운 본능의 산들바람을 노래한다.

그리고 설렘을 잃어버린 일상의 공허함을 일깨운다.

감정과 생각의 생성 과정을 정확히 포착하는 예측 불가능한 대사들,

관객을 향한 고백 형식의 자기 분석들이, 상투적일 수 있는 이 연극을

유쾌하고 솔직한 한바탕 정신의 모험으로 바꾼다.

그리고 여기서 춤은 바람이 아니라 자유다.

 

 

 

'선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무용선생은? 남편은? 연극을 보는 내내 들었어야 할 그런 의문이 들지 않았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더라.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딸, 며느리, 올케가 아닌 '선여'라는 여자가 스스로 여자임을 자각하는 순간들이 마치 봄의 초록 새싹처럼 파릇파릇했다. 아줌마도 그럴 수가 있는가? 싶다가도, 자전거 헬멧을 쓴 귀여운 '선여'의 모습이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무용선생이 다른 강습생들을 쳐다보면 무섭게 질투하고,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함께 해 보고 싶어 한다. 남편과 결혼했을 때는 생각해보지 못 했던 일들이다. 유부녀와 바람이 나면 여자는 비밀이 되고 남자는 무용담이 된다던 무용선생이, 장난과 호기심으로 가볍게 시작한 '선여'와의 만남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느낌도 인상 깊었다. 마치 춤을 출 때처럼 온몸의 근육들이 깨어나 긴장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어느 순간 바람이 겨드랑이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고. 그 순간이 미치도록 좋고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그런데 '선여'를 만날 때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어버린 무용선생과, 아프다고 손을 빼려는 아내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놓지 않듯 꼭 잡고 있는 남편의 슬로모션이, TV 멜로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연극적인 감성을 전달해 주었다. 젊은 학생들이 많이 관람한 연극이었지만 결혼한 부부들이 관람하면 더 좋을 것 같은 연극이다. 이렇게 아파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사랑이 나를 이렇게 다시, 아프게도 할 수 있다니... 7년을 잊고 살았지만 아프게 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감하는 남편의 모습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최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