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재현 '문(門)'

clint 2023. 10. 10. 08:2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돌아보는 작품이다.
이 문을 열고 닫는 문제에 따라 19세기 중후반 우리의 역사는 요동친다.

미 공연 작품임.

 

이재현의 <>은 사극으로서는 특이한 형식을 갖춘 작품이다. 극중극 형식을 취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남학생 다섯, 여학생 둘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인물의 모습을 재현시키는 재치 있는 형식을 무대에 나타내고자 했다. 어느 한편으로는 서사극 적인 요소와 우리의 민속가면극의 공연 양식을 가미한 인상이 짙다.

1866년의 병인양요에서 시작되는 이 작품에는 외국인신부들은 물론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까지도 등장한다. 같은 민족이 보고 느끼는 주관적 입장과 밖에서 보는 외국인들 의도를 동시에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풍운아 대원군의 인물과 그를 중심해서 일어난 사건을 객관적으로 묘사해 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뚜렷하다. 물론 이런 역사극 계열 작품의 공연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배제할 수 없다. 공연 주체인 대학생들 각자는 필요에 따라 대여섯의 역할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웬만 한 능력을 갖고는 공연에 하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일곱 명이 소화할 배역이 25名이나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에도 불구하고 사실(史實) 서술에만 끝나는 종래의 사극(史劇)과는 달리 새로운 형식을 개발하여 오늘을 사는 학생들이 과거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반응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흥미를 끈다. 작가 이재현은 이 작품을 통하여 한 시대의 인물과 사건에 대해 흑백을 가리지 않고 관객의 판단에 맡겨 극중 이 작품의 작가로 나오는 學生1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피하자. 우리는 많은 자료를 동원하여 한편의 연극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다. 관객의 판단이 따라 주기를 기대하며 이 연극의 막을 내린다.” 라는 말을 하게 한다.

 

이재현 작가


병인양요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속에 1866년 병인년에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때 프랑스 신부를 잡아 처형하였다. 외세가 쳐들어오면 천주교도들이 이에 호응할 것을 두려워해서 였다. 1866년 10월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공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 신부 처형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병인양요라 부르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는 조선 의용군과 사격술이 능한 포수의 기습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조선 측은 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데 반해 프랑스군은 2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은 더 이상 조선에서 싸울 생각을 못하고 바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 등 문화재와 은궤를 약탈해갔다. 병인양요의 의미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고,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 농업 기반 국가 군대와 산업 기반 국가 군대와의 전쟁에서, 드물게 농업 기반 국가인 조선의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 장면.



신미양요
1871년 5월 이번에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과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공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대동강에 진입한 무장 상선 제너럴 셔만호를 조선군대가 화공으로 불태운 사건을 말한다. 신미양요의 전개 양상은 병인양요와 달랐다. 미국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 보유하고 조선에 출동하였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지휘관 어재연을 포함하여 53명이 전사하였고, 24명이 부상하였다. 그러나 미군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사망자가 400명 이상이라 한다. 정확한 조선군의 피해를 알 수 없지만 격렬한 전투였고, 조선군이 미군에 비해 크게 피해를 입은 전투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끝까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조선의 개항을 단념하고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으로 출동한 콜로라도 호와 미군장교들. (1871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결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다가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군사력을 기르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 산업의 힘을 갖추고 이를 위해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신미양요 4년 후 일본의 운양호가 강화도를 침범하였을 때 조선은 굴복하였고 다음해인 1876년 조선은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일본과 체결하였다. ‘여우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이는 두 번의 전쟁을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결과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문명의 전환기에 쇄국정책을 뒷받침한 위정척사사상에서는 시대를 헤쳐 나갈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그 때 대원군이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