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상현 '자객열전'

clint 2023. 10. 11. 20:39

 

 

<자객열전>은 정치적, 사회적 담론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구조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 

시공간을 넘나들며 허를 찌르는 시간 구성 속에 동서양 자객과 테러리스트들이 한 곳에 만난다.

김구가 이봉창과 일왕 암살 모의를 하는 기둥 줄거리에 사기(史記)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조말, 예향, 형가에서 시작하여 19세기 말 러시아 혁명가들과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 등

동서양의 원조 자객과 테러리스트들이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 속에 함께 하면서도,

“감옥에서 식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백범의 우스꽝스러운 독백처럼

슬픈 분노와 안쓰러운 복수의 활극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1931년 12월. 중국 상하이 불란서 조계의 한 식당. 백범 김구와 이봉창이 일왕을 격살하고자 모의하고 있다. 큰 뜻을 품고 봉창이 떠나려 할 즈음 뜻하지 않은 사정이 생겨 그의 거사는 번번이 미뤄지고, 그때마다 먼저 보낸 동지들의 거사가 실패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왜 폭탄은 늘 불발인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는 국지전과 테러행위들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였기에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게 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자객열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동서의 원조 자객과 테러리스트들을 불러와 연속적인 극중극을 짜임새 있게 펼쳐낸다.<사기(史記)>자객열전에 나오는 춘추전국시대의 자객들(조말, 예양, 형가 등),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러시아 혁명가들, 미국의 아니키스트 엠마 골드만 등이 시공을 뛰어넘어 명분에 죽고 의리에 사는 영웅적 활극을 벌인다.

 

 

 

관객들에게 자객(테러)이라는 것이 소국이 부당한 침략을 받았을 때 강대국에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말하며 그 폭력성 이면에 숨은 약소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생각하게 한다.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지만 극은 매우 재미있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가난해서 거지와 다름없고, 테러는 불량 폭탄으로 매번 실패한다. 비장할 것만 같은 이야기는 산만해 보일 정도로 가볍고 짐짓 무거운 듯 연기하는 배우는 폭소를 터트리게 한다.
이 연극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재해석. 감옥에서 식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백범의 독백은 민족의 큰 스승으로서의 위대함 이면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방대한 사건들을 인형극과 그림자극 등으로 재치 있게 처리한 무대 기법도 돋보인다.

 

 

 

'Terrorist'라는 소제목이 붙은 연극<자객열전>은 1931년 백범 김구와 이봉창, 윤봉길 등이 폭탄을 던져 일왕을 격살하려 하는 하나의 이야기 씨실에 과거와 미래, 세계 곳곳의 테러리스트(자객)들의 이야기를 날실로 엮어 다양한 극중극 형태로 변용하고 있다. 극의 중심이야기는 1931~1932년 중국 러시아 구역의 요릿집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재미와 더불어 약간의 혼란을 동시에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대기 중인‘ 이봉창은 곧 자신이 저지를 테러(혹은 독립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영원한 쾌락의 길’이라고. 이봉창의 이러한 발언은 테러를 미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혹은 번번이 테러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백범 사단(?)에 대해 관객들은 폭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 작품은 테러를 미화 혹은 희화하는 듯하다가도 인질극을 벌이다 가스에 질식해 숨진 체첸의 여전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테러는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져보면 이 작품은 테러에 대해 명확한 호·불호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사실 말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 작품의 관심사는 테러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명확한 입장(평화를 저해하는 테러는 나쁘다 등의)을 확인하고 싶었던 관객들은 이 작품에 대해서 다소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쾌감을 느낄지도.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도, 윤봉길 의사도 우리 쪽에서 보면 독립투사요, 위인전에도 실리는 위인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테러리스트다. 그러니 테러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극단적 입장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테러의 양면성과 더불어,

 

 

 

이 작품은 테러에 대한 가치판단을 차치하고 테러리스트 자체에 대해 그렸기 때문에 또한 관객들에게 혼란을 줄 여지가 있다. 극중 아주 기발하게 재밌는 장면-이를테면 그림자극이나 요리를 만드는 소리로 음향을 대시하는-에서도 관객들은 예상만큼 웃지 않았다. 옥중에서 남이 사식을 먹으면 미칠 듯이 그것을 먹고 싶었다고 말하는, 친근하고도 코믹한 백범 김구의 묘사에서도 근엄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테러란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누군가 희생하고 아파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나쁜 일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러니 연극에서까지 교훈을 찾지는 말자. 연극<자객열전>에서 반드시 9.11테러와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과 이라크 전쟁의 의의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박상현

 

 

작가의 글
TV 사극을 보자. 새로 등극한 젊은 국왕이 새로운 개혁 정책을 단행하고자 한다. 모든 개혁에는 기득권과 보수세력이 반대하게 돼 있다. 그들이 정혜선(대왕대비마마 역은 그가 가장 많이 했지 싶다. 실례. 대선배 연기자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었다.)을 꼬득인다. 대왕대비마마는 권문세가 출신이다. 그가 국왕을 방문한다. 왕은 할머니에게 개혁의 내용을 조목모족 설명한다. 그러자 정혜선 왈, “어허, 주상, 그건 대명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요!”
조선은 명나라에 꼼짝을 못했다. 심지어는 명나라가 망하자 그를 이어받은 나라라 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고, 200년이 넘도록 청나라 모르게 신종황제(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결정한 명의 황제)를 제사지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니까 친미보수주의자들이 길길이 반대했다. 의리를 지키자면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 당나라의 소정방 장군의 동상도 세워야 한다. 한갓 연극쟁이 주제에 왜 이런 정치적인 언사를, 그것도 순진하게 내놓느냐고? 내 얘기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연극이, 예술이 현실을 얘기하는가? 종교인들이 모여 북한 정권 타도와 조지부시 만세를 외친다. 종교적 신념일 것이다. 철학자들이 모여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를 선언한다. 현실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컸을 것이다. 예술가가 현실을 말하면 철학자보다 덜 역겨울까? 예술가는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객관적 진실로서 얘기할 때 백범 김구 선생은 테러리스트이다. 일본에게는 당연히 그러했고, 우리 민족에게 동정심이 없었던 나라 사람들에게 그는 테러리스트였다. 심지어 해방후 미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도 그를 테러리스트의 두목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우리 민족의 스승, 큰 어른이신 백범 선생께서 테러리스트라니. 애국주의라는 현실적 정서에서 보니 백범이 테러리스트라는 진실이 불편하고, 세계 최강 미국이라는 존재를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서 보자니 이라크 전쟁도 북 핵도 다 미국이 문제의 본원이라는 진실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테러리스트와 테러의 본질에 대해서 궁구해보게 된 것이다. 테러 그 자체보다 테러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거기에 어떤 보편적 사실이 찾아지게 된다. 테러의 이유(의리, 충절, 약속, 종교적 신념, 극심한 경제적 격차, 강성한 힘의 압박, 인종주의적 압살 등등)가 전 지구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고, 역사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으로 그러하고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아니, 어쩌면 미래까지)그러하다는 것, 이것이<자객열전Terrorists>주제의 공시성(Diachrony)과 통시성(Synchrony)이 극적 구조로서 구체화된 연유이고, 이 연극이 열전(列傳, series) 형식을 갖게 된 이유이다. 이 극을 보고, 또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불편한 분이 있다면 내 언사의 논리에 문제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연극을 만드는 내 기술에 문제가 있어서일 것이다. 연극과 예술이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명제에 누가 부정할 것인가. 때로는 망각이, 때로는 강고한 현실이 문제일 것이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지수 '과자집에 살아요'  (1) 2023.10.12
김안기 원작소설 하유상 각색 '깊은 밤 개소리'  (1) 2023.10.12
성기웅 '다정도 병인 양하여'  (2) 2023.10.10
이재현 '문(門)'  (2) 2023.10.10
최원석 '변태'  (2)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