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극 『원로정치가』는 시인의 나이 70세 되는 1958년에 공연된 엘리엇의 최후작품이다. 전체 3막, 등장인물 8명으로 짜여진 이 극은 그의 극 중에서 가장 길이도 짧고 상징성이 적은 평이한 내용이다. 주인공 클래버튼 경은 거물 정치인으로 국회의원 생활을 청산한 후엔 기업체의 회장으로 있다가, 이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의사의 권유로 요양 중에 있다. 딸 모니카는 젊은 국회의원 찰스 헤밍튼과 약혼 상태에 있으나, 혼자 있는 아버지의 곁에 있어 주기 위해서 결혼을 늦추고 있다. 말썽꾸러기 아들 마이클은 부친의 친구가 마련해준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에 나가 독립적으로 사업이라도 해 보려고 하고 있다. 제1막에서 클래버튼 경은 옛날 옥스포드 대학시절의 동창생 프레드 칼버웰의 방문을 받는다. 이 동창생은 페데리코 고메즈라는 별명으로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산 마르코 공화국에 살고 있다. 영국에서 위조지폐에 관여하여 형무소 살이를 한 일이 있는 고메즈는 클래버튼경에게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대학 때, 방탕의 길로 빠져 학교를 퇴학당하고 결국 해외로 망명한 원인이 모두 클래버튼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비난한다. 고메즈는 클래버튼경을 만나자 옛날 대학시절의 비밀을 상기시킨다. 그들이 옥스포드에 다닐 때, 아직 귀족 칭호도 없는 무명의 <평범한 딕 페리>였던 클래버튼은 달빛 밝은 밤에 차를 몰고가다가 한 노인을 친 채 뺑소니를 친 일이 있다. 다행이랄까 치인 그 노인은 이미 죽어 있는 시체였지만 클래버튼은 그때 차를 세우지 않은 것을 뉘우치고 그 떳떳치 못한 비밀스런 일을 가슴속에 숨겨 오며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껴 왔다. 제1막에서 두번째로 클래버튼을 찾아온 것은 미세스 카길이라고 하는 옛날 런던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레뷰(revue)쇼의 가수이다. 한때 메이지 몬트조이 라는 예명으로 연예계에 널리 알려졌던 그녀는 클레버튼에게 크게 반하여 깊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이르렀으나, 클레버튼의 부친의 반대와 회유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자 측에서 제기한 파혼소송에 대하여 남자에서 많은 위자료를 지불함으로써 여자를 단념시킬 수 있었고, 클래버튼은 부친이 바란 대로 돈 많고 신분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 경계의 진출과 출세의 길이 열렸다. 몬트조이는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한때는 세속인으로 행세하고 지금에 와선 원로정치인으로 포즈를 취하는 클래버튼 경의 양심의 가책을 추구한다. 제1막에서 클래버튼경은 그동안 오래 부끄러운 일들을 숨겨두었던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게 그것을 딸 모니카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식들을 지배하려고 한데 대해서도 모니카에게 용서를 구한다. 한편 모니카와 찰스는, 과거를 뉘우치고 일체의 가면을 벗어버리고서 본연의 자아로 돌아간 아버지를 용서함으로써 더욱 아버지를 사랑하고, 자기들의 사랑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아들 마이클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온 고메즈의 주선으로 그곳에 가서 고메즈와 함께 무역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떠난다. 극은 자식들이 각자 자기들의 길로 떠나고 클래버튼은 머지않아 닥쳐오는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이 극을 속죄와 구원의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볼 때엔 『가족의 재회』의 변형이다. 클래버튼경은 옥스포드의 동창생 고메즈와 코미디 가극의 가수 미세스 카길이 나타나 과거의 떳떳지 못한 비열한 짓들을 상기시키자, 지금까지 세속적 가면을 쓰고 자기를 망각한 채 살아온 과거를 뉘우치고 가혹한 자책에 빠져든다. 『가족의 재회』에서 해리는 복수의 여신 Eumenides의 추적을 받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깊은 고뇌와 운명적인 그림자에 시달린다. 클레버튼경은 해리와 마찬가지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말미암아, 그리고 형법상의 죄가 아닌 본질적인 죄의식으로 고뇌한다. 클래버튼 경은 자기를 찾아온 두 사람의 남녀를 과거의 망령들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망명이 아니라 손인중에 속죄와 구원을 일깨워 주는 메신저들이다. 고메즈와 미세스 카길은 해리의 복수의 여신들과는 달리 클래버든 경의 과거의 죄를 말해 주는 구체적 인물들이다. 클래버튼 경은 이 인물들을 만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모니카에게 고백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이 고백의 행위는 일체의 허위와 위선과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그것이 곧 사랑의 행위이다. 속죄와 고백을 통하여 도달하는 사랑은 곧 신의 은총이다. 그것은 인간이 <연옥의 불>을 거쳐 획득하는 신생을 의미한다. 원로정치가 클래버튼 경이 모든 과거에서 자기를 해방하고 새로운 사랑으로 넘어 사랑하고 상실한 자신을 회복했을 때에 그는 신생을 얻은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죽음으로써 새로 살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으로써 생을 찾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속죄와 구원의 문제, 죽음과 영생의 문제는 엘리엇의 시와 시극에서 한결같이 취급되는 기본적 주제이다. 이 주제가 『원로 정치가』에서는 『네 사중주』나 『가족의 재회』에서와 같이 명상의 세계, 혹은 비전의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고, 한층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 머무른 것이 이 극의 특징이다. 엘리엇이 이 극의 권두에 부인 발레리 엘리엇에게 바치는 간절한 사랑의 시를 싣고 이 극에서 모니카와 찰스의 인간적 사랑을 매우 긍정적으로 찬미한 것이 주목된다. 그 점을 그가 이 작품의 발표 불과 1년 전인 1959년에 젊은 여비서 발레리와 재혼한 사실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에, 이 극을 엘리엇의 개인적 자기 고백의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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