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물〉은 2005년에 분가쿠자 아틀리에의 공연을 위해 의뢰를 받아 쓰게 된 작품으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집필 당시 쓰쿠다는 병환으로 어머니를 잃고 연로한 아버지와 둘이서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앨범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아버지의 사진 속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 끝에 젊은 나이로 되돌아간 아버지와 자신이 대화하는 상상하며, 허물을 벗을 때마다 젊어지는 아버지, 그리고 클론처럼 60대, 50대, 40대, 30대가 되어 되살아나는 허물들이라고 하는 기발한 발상을 엮어낸다.

어느 여름날, 공영주택의 한 칸. 어제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오늘은 아내에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압박을 당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스즈키 다쿠야. 41세의 전 우체국 직원. 대학시절 친구와의 불륜이 발각되고 교통사고로 인사사고를 내 직장에서도 해고된 상황. 심장이 나빴던 어머니는 연이은 악재로 마음고생을 하다 타계. 치매증을 앓고 있는 82세의 아버지 혼자 남겨진다. 남자는 오줌을 싼 아버지를 데리고 화장실로 간다. 그런데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다. 아버지를 찾으러 화장실로 가보았더니, 거기엔 아버지의 허물만 남아 있다. 아버지가 허물을 남기고 돌아가신 줄 알았지만, 20년이나 젊어진 아버지는 원기 왕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뒤에도 날마다 마치 매미처럼 탈피를 거듭하여 아버지는 계속해서 10년씩 젊어진다. 남자는 젊어지는 아버지를 만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지만 점차 그 젊은 아버지의 과거에 직면하게 되고, 지금까지는 과거의 추억 속에, 아니 의식의 저 밑바닥에 감추어두고 있었던 부자지간의 정을 새삼 느끼게 된다.
<허물>이란 작품이 보여주듯이 쓰쿠다 노리히코는 관념적인 구조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 시니컬한 부조리극을 즐겨 쓰는 작가이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과거, 젊은 아버지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하는 아주 평범한 부자지간의 사적인 이야기를, 허물을 벗으면서 젊어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극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극적인 장치들이 아베 고보나 카프카의 부조리극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쓰쿠다의 연극세계는 그들의 작품이 실존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작품의 전반이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물며 소재 자체가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극임에도 불구하고, 쓰쿠다의 작품은 웃음이 많은 희극이 대부분이다. <칸칸남자>, <정육공장의 미스터 케첩> 등이 대표적이다.

〈허물〉은 부조리 희극이다. 주인공인 스즈키 다쿠야는 40대의 아버지인 아버지4와 가장 크게 갈등한다. "전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 그때 그대로야.”라든가, "아니지. 나는 엄마, 아버지의 부부싸움을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언제나 옳은 소리는 엄마가 했어.”라든가,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어. 들뜬 생활이 몸에 배서 직장은 금방 바뀌고, 여자 좋아하지.... 그러니 '안정된 직장이 최고다', '권력에는 순종하는 게 최고', '이왕이면 큰 나무 그늘'...... 그렇게 배웠어, 난...... 그렇군, 장본인은 너였어.”라고 하는 남자의 대사에서 알 수가 있다. 남자와 아버지4는 몸싸움을 할 만큼 감정의 갈등을 드러낸다. 끼가 많아 놀기를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아버지4는 아들의 여자 친구와 며느리한테까지 추파를 던지고, “……좋았어,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죽을 상' 어때?”라고 하는 말로 그런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들을 향해 소극적인 복수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아버지에 대한 남자의 말투의 변화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치매를 않고 있는 80대의 실제의 아버지1과, 1차로 허물을 벗은 60대의 아버지2에게는 공손한 말투였다가, 그나마 어릴 적 추억이 있는 50대인 아버지3에게는 어린 아들의 응석으로 받아줄 수 있는 정도의 무례한 태도로 바뀐다.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진 끝에 남자와 같은 나이인 아버지4에 대해서는 "이게 내 아버지라고……?” 또는 "양아치야, 보면 볼수록.”. 이윽고 아버지에게서 "하나만 충고하겠는데…… 나보고 '너' 라고 부르지 말았으면 하는데.”라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말이 거칠어진다. 반면에 남자보다 나이가 더 어려진 아버지5에 대해서는 오히려 친근함을 드러낸다. "좀 감동했어... 나도 허물을 벗고 싶어졌어.…… 어? 이봐, 이리 나와…… 이젠 징그러운 이야기는 안 할 테니까… 응? 이봐.” 라고 하는 남자의 대사에서 그런 변화가 드러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운명적인 만남,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기적과 숙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연민을 느끼는 말투로 변해 있다. 이는 남자의 아버지에 대한 심리의 변화(혹은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 가지 덧붙여 우리말의 경어와 일본어의 경어가 조금 다른 부분을 언급한다면, 우리말의 경어가 상대방과 자신과의 사회적인 관계로 결정지어 지는 데 반하여, 일본어의 그것은 상대방과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결정이 된다. 전문적으로는 우리말의 경어를 절대적 경어, 일본어의 경어를 상대적 경어라고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경우는 아버지와 나라고 하는 사회적인 관계로 그 정중한 정도가 정해지는 데 반하여, 일본어의 경우는 아버지와의 친근감이나 심리 상태로 그 정도가 정해지는 특징이 있다. 인생의 좌절을 맛본 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각 세대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삶과 체험을 숨김없이 들려준다. 단골 찻집 이야기, 쇼와 시대의 추억, 아내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전쟁의 상처까지. '사람'과 '허물'과 '영혼'이 등장하는 〈허물〉은 작가가 '보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빚어낸 재미있는 상상의 결과물이다.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소재인 부모 - 자식 간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니만큼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공감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쓰쿠다 노리히코(個典彦)
1964년 아이치 현(愛知縣) 나고야 출생. 1983년 메이조대학 (名城大學)에 입학과 동시에 연극부에 입단하여, 대학극단인 <시시>에서 극본을 쓰기 시작. 1986년 가미야 쇼고 등 남자 단원 6명으로 구성된 극단 <B급 유격대>를 결성하여 주재하고 있으며, 극작, 연출, 배우를 겸하고 있다. 지극히 엉뚱한 시추에이션을 사용해, 세계를 서정미 넘치는 웃음으로 채색하면서 작품화하는 특징이 있다. 나고야를 근거지로 삼아 희곡 외에도 라디오 드라마, TV 드라마 각본 등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1970~80년대에 나고야는 도쿄에서 화제가 된 소극장 연극의 순회공연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곤 했는데, 쓰쿠다는 이러한 소극장 제1세대, 제2세대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1987년 <심판~달콤 쌉싸름한 캐러멜 맛>으로 제3회 나고야 시 문화진흥 상 수상을 비롯하여, 1995년에 같은 작품으로 나고야 시 예술장려상, 1996년에는 <칸칸(KAN-KAN)>으로 제2회 일본극작가협회 우수신인희곡상과, 제4회 요미우리 연극대상 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0년에는 〈정육공장의 미스터 케첩>으로 제6회 일본극작가협회 우수신인희곡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 <만족 한 산책자>로 제5회 마쓰바라 에이지(松原英治), 와카 오마사나리(若尾正也) 기념 연극 상을 수상한데 이어서, 이윽고 2006년에는 〈허물〉로 제50회 기시다쿠니오 희곡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 밖의 작품에는 〈토관(土管)〉, 〈칸칸남자>, 〈프라모럴> 〈창공프리즌>, 〈무뢰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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