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제목의 세 가지 음식 杂拌, 折罗, 或者沙拉이나, 번역한 제목의 세 가지 음식 비빔, 잡탕, 샐러드나 공통점은 대단할 것 없는 각각의 재료들을 적절한 소스를 곁들여서 나름의 방식으로 '뒤섞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다양할 수 있는 식재료들은 사실 단독으로는 뭐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적절한 소스나 양념을 사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뒤섞어내면, 하나의 음식이 된다. 이것이 바로 제목에 들어있는 음식 이름들의 공통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재료는 다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레시피가 자유롭고 가변적이어서 맞고 틀리고, 정확하고 아니고의 개념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이 음식들의 본질은 '자유'와 "다원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는데,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갇혀 있음" 이라는 공통의 처지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세 이야기 사이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의 단편들 같은 이 세 가지 식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에, 작가 자신도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내놓았다. '비빔이라고 생각하시든, 잡탕이라고 생각하시든, 아니면 샐러드라고 생각하시든, 뜻대로 하세요.'라고 하듯이. 이는 불친절이나 무성의가 아니라, 독자 또는 관객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며, 적극적인 체험을 위한 초대이다. 사람마다 경험과 기억이 다르고, 성찰과 관람의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와 "다원성"은 피동적이라기 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상황은 "갇힘"이다. 비좁은 물리적 공간에,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고통에, 답을 찾을 수 없는 기억 속에, 자아실현의 집념 속에, 감옥에, 비밀이나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 빅데이터 속에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계에 갇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코비드19를 겪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14일간의 격리 중에 일어난 일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극중인물 "여자"가 처한 곤경은, "격리"나 "감금" 그 자체가 아니라 격리와 감금으로 인해 직면하게 된 자신의 기억과의 조우이다. "남자"에 대한 의심과 이혼의 열쇠가 되는 '그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에 대해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치 '사랑을 확신한 순간에 들려온 사망 선고'처럼 허망할 뿐이다.
여자의 질문이 반복되는 지명 "쉬슈관"은 장쑤성 쑤저우시(市) 근교에 있는 실제 지명이다. 물론 이 지명은 이 극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극중 고고학 동호인인 "남자"가 갈만한 곳을 생각하여, 실제로 고대유적이 있어야 하고, 듣기 좋은 이름이어야 하고, 글자 에서 은유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낸 지명이라고 한다.
2번째 에피소드는 감옥을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낀다는 어느 절도범에 대한 가상의 인터뷰이다. 이는 광시성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기초로 한 것이다. 십여 년 전 전동자전거 절도범으로 검거된 저우 모씨의 체포 당시 인터뷰가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그는 전동자전거의 "체게바라"라는 애칭을 얻으며 인터넷 스타가 되었고, 인터뷰 영상에서 그가 쏟아낸 말들이 "어록"으로 전해지며 ‘인터넷 밈’이 되기도 했다.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다. 친구도, 여자친구도 없다. 하지만 구치소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다 인재들이고, 말들도 잘해서 그(구치소) 안에 있는 느낌이 좋다." 라던가 "일은, 일은 할 수가 없다. 한평생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말들이 그의 광시 사투리와 독특한 말투로 인해 반향을 얻었고, 특히 젊은 연령대의 출근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작가는 중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 잘 알려진 이 전동자전거 체게바라의 인터뷰를 가져와 두 번째 에피소드의 재료로 활용한다. 여기에 "너구리 가죽 이야기를 결합하고, 또 강렬하고 놀라운 반전을 통해, 희극적인 재료와 요리를 장엄하고 비극적으로 플레이팅(plating)한다.
3번째 에피소드는 대사가 거의 없는 무언극이다. AI가 가진 전지전능과 무소 불위의 놀라운 능력은 엄청난 즐거움과 유익함을 주지만, 점차 AI의 속박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내용이다. (중국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했고 가장 빠른 속도로 실생활에 응용되고 있는 나라이다.)
자기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하는 장휘는 중국 현대연극의 심장이자 연극인 양성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희극학원 연출학과를 졸업하였고, 박사학위가 있는 "공부하는 연출가다. 주로 석사 학위를 받은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약 20편에 가까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꾸준하게 활동해 왔고, 이를 통해 실력을 다져왔다.
이 작품은 2021년 고루서(西) 극장의 <1+1 청년연출가 연극제작 프로젝트>의 성과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는 젊고 실력 있는 청년 작가나 연출가가 창작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연극 창작 주체(작가, 연출가, 문학 고문, 예술 고문 제작사 등)들을 일대일로 매치하여 공연을 제작하도록 지원한 것인데, 장휘는 이 프로젝트에 발탁되어 공연제작사인 다마이Mailive와의 협업을 통해 이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2021년 9월 고루서 극장 초연의 대성공으로 인하여, 이 작품은 연이어 같은 달에 개최된 제8회 우쩐 연극제에 파격적으로 특별 초청작으로 참가한다. 그리고 <신경보>가 선정한 2021년 중국의 10대 연극에 이름을 올린다. 장휘는 우리 연극판의 표현을 빌면, 무대 위에서 좀 ‘놀 줄 아는’ 예술가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연기와 온갖 놀이를 통하여 무대에서 에너지가 폭발하였다. "갇힘", "감금"의 공간은 숨 막힘보다는 오히려 에너지가 압축되었다가 터져 나와 분출되는 공간으로 변했다. 비극적 이야기가 희극으로 탈바꿈하고, 희극적 이야기가 비극으로 전환되었으며, 언어를 통제한 무언극이 오히려 관중들의 폭소와 열광을 자아냈다. 탄탄한 연기를 자랑하는 세 명의 배우가 각기 배역을 돌아가면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연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아치"를 연기한 배우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광시성 출신이라 중국인이 듣기에도 독특한 억양과 어조의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면서 엉큼하고 불량하고 광기어린 연기를 선보여, 고루서 극장과 우쩐 연극제의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코로나 시국의 한복판에 제작된 이 연극은 말 그대로 코로나 시국을 산 중국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지난 세월 놀라운 속도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뤄온 오늘날 중국 사회의 양지와 음지, 그리고 다양한 군상들의 여러 가지 목소리와 쏟아져 나오는 에너지를 모두 담아 적절히 뒤섞어 놓은 하나의 샐러드 보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82년 <절대신호>를 통해 중국에 소극장연극이 시작된 지 40년이 되어가던 시점에, 중국 소극장운동이 추구했던 오락성과 실험정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적인 사례로 이 작품을 꼽는 것은 타당하고, 의미심장하다.
장휘는 이 작품의 성공에 이어 2022년 <탄닌(單寧)>을 제작하여 또다시 우쩐 연극제를 들썩거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에는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개와 고양이의 시간>의 라이센스 공연(2023년 3월 17일 개막)의 연출을 맡아 최초로 뮤지컬 연출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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