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안정민 '사랑연습-갈비뼈타령'

clint 2023. 7. 1. 13:22

 

창작집단 빨간 수염은 런던 인터내셔널 마임 페스티벌의 초청 메일을 받는다.

이번 런던 인터내셔널 마임 페스티벌의 키워드는 신화이다.

그들은 동양의 신화를 극화한 작품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창작 집단 빨간 수염에게 한국의 신화를 연극으로 소개해줄 것을 부탁한다.

주최측은 특별히 한국의 판소리라는 신기한 것에 매료되었으니,

판소리+신화+한국적인 것의 조화로 지원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종용한다.

창작집단 빨간 수염의 단원들은 그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신화를 다시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떤 신화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신화 중에 하나를 선택해 다시 쓰기로 한다.

당곰 신화를 다시 쓴 그들은 그것을 판소리로 흉내 내어

쇼케이스 비디오를 찍고 런던에 보낸다.

런던 사람들은 한국의 신기한 신화에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태어나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바리데기 신화, 강간당하고 집에서 쫓겨나 홀로 세 아이를 키워 아비에게 돌려보낸 당금아기 신화는 그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신화들은 한때 사후세계, 출산을 해명했던 여성신화였지만 현대를 사는 빨간수염의 구성원들은 신화에 동의하지 못한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들을 보장받지 못한 채 역경에 처하고, 깊은 효심과 모성으로 고난을 극복해내는 이들 신화는 더 이상 삶의 규범도, 믿음도, 하다못해 재미도 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 창작자들의 입장에서 신화 속 주인공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처하게 되는 역경과, 여성의 덕목으로 주어지는 과업과 그 수행 과정은 부당한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딸과 어미로서의 바리데기와 당금아기의 희생과 그에 대한 보상은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한다.
빨간수염의 구성원들은 신화를 다시 쓰기로 한다. 음악감독의 가야금 연주, 내레이션과 함께 쇼케이스 촬영이 시작되고, 이들은 인류 최초로 ‘구멍’을 가지고 태어난 당금의 이야기를 카메라와 객석 앞에 풀어낸다. 당금은 어느 날 신기함에 이끌려 스스로 몸을 탐색한다. ‘구멍’을 이리저리 만져보던 당금은 이내 기분 좋은 느낌을 얻는다. 자신의 몸을 탐구하며 당금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 ‘구멍’을, 또 이 ‘구멍’을 가진 자신의 몸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깨친 당금은 어느 날 찾아온 중의 다리 사이에 하나의 ‘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당금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중을 선택하였다는 점은 당금아기와 당금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원작 신화에서 당금아기가 중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그녀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중의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당금은 스스로 중을 택하여 쌀을 쏟고, 중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중에게 ‘구멍’과 ‘살점’으로 더욱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그와의 관계를 주도한다. 당금아기 신화에 묘사된 중이 집에 머무르는 과정이 다소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느껴졌다면, 새로 쓰인 신화 속 당금과 중이 쌀을 줍는 모습은 즐겁고 유쾌한 접촉과 유희가 된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당금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나의 몸에서 비롯된 사랑을 기반으로 한 타인과의 사랑을 경험한다. 관계가 끝난 뒤, 당금은 중의 터무니없는 결혼 제의를 거절한다. 이내 그녀는 세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원작 신화 속 무책임하게 떠나버렸던 중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당금아기를 쫓아낸 부모도 없다. 당금은 스스로 거취를 결정한다. 출산 또한 마찬가지다. 동굴 속에서 출산을 앞둔 당금은 뱃속의 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몸을 통한 즐거움과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꿈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 출산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나아가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직접 ‘구멍’과 ‘살점’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당금의 사랑은 타인에게 몸 탐색의 즐거움을 전파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원래의 당금아기 이야기가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상징, 해명하는 신화였다면 새로 쓰인 당금의 이야기는 사랑을 해명한다. 성(性)의 기능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신화에서 인간의 성기는 출산을 위한 기관을 넘어서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으로 기능한다. 몸 탐색을 통한 행복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이는 다시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된다. 내레이션으로 전해지듯 “서로를 신기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몸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만나며 깨우친 당금의 사랑이다. 몸에서 시작되는 사랑에 대한 해명은 자신에 대한 탐구가 선행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한 새로운 신화를 통해 정립된 이 ‘사랑’은 제각각의 신체를 가진 모든 이들이 스스로와 타인을 신기해하고, 탐구하고, 교감할 수 있게끔 하는 넓은 의미의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빨간수염의 쇼케이스는 당금이 아이를 낳아 그들에게 성기를 만들어주고, 이후 인간들은 몸을 통한 사랑과 기쁨을 나누었다는 데에서 끝난다. 그러나 카메라가 꺼진 뒤, 배우에 몸에 씐 당금의 혼은 결국 자신은 홀로 남지 않았느냐며 호소하고, 성경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갈비뼈로 짝 ‘아담’을 만든다. 이를 통해 당금은 비로소 신의 지위를 완성하는 것이다. 원작 신화의 당금아기가 아이들을 잘 키워 아비를 만나게 한 뒤 어머니의 신격을 얻었던 것과는 다르다. 당금은 스스로 몸을 탐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발견하여 나에 대한 사랑, 성적 대상과의 사랑, 범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성경의 창조주에 상응하는 행위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실현함으로써 사랑의 연습을 마치고, 진정한 사랑의 신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적인 동력은 바로 당금의 욕망이다. 당금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망설임 없이 전진한다.

 



당금은 자신의 짝을 택하고 버릴 때에도, 아이를 낳을 때에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아무런 음흉함이나 야릇함 없이 남성의 엉덩이를 향한 찬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제껏 남성 가수들은 “허리는 너무 가는데 힙이 커”다란, “네 옆에 서면 비욘세 엉덩이도 납작”한 여자를 찬양하며 “네 엉덩이가 좋아”라고 고백해왔다. 그럼에도 남성 엉덩이에 대한 여성의 찬가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당금은 자신의 신화 속에서 남성의 엉덩이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이고 자유롭게 노래한다. 허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때리며 추는 당금(들)의 춤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몸짓이 스스로를 대상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의 행복을 표현하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과 이를 충족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드러내는 데에 적극적인 당금의 모습은 그녀의 자위 장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자신의 몸을 탐색하며 쾌감을 느끼는 모습은 무대 위에 음악과 함께 표현된다. 분홍빛의 조명 아래에서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듯한 안무와 함께 경쾌한 구음으로 이어지는 음악을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까지 여성의 자위 장면이, 여성의 성에 대한 욕망과 충족, 그리고 그 즐거움이 드러났던 적이 있었던가. 남성의 자위 장면은 숱한 영화와 농담, 소설 등에서 클리셰로 쓰인다. 숨기지 못한 자위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에서 오는 낯부끄러운 웃음, 외롭고 비루한 삶의 상징과도 같은 남성의 자위 장면 묘사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그러나 여성의 자위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여성 자위에 관한 영상이나 텍스트가 있어도 교육의 차원에 가까웠을 뿐, 예술적 표현 수단이나 묘사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 당금의 자위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낯부끄럽기보다는 유쾌한 자기 행복 찾기로 그려진다.

 



옛 신화 속에서 성과 직접 관련된 부분들이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지만 지금 여기의 신화는 육체와 사랑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며, 성을 바라보는 관점마저 뒤틀어버린다. 교육의 목적도, 대상화의 목적도 없는 솔직한 성과 욕망은 외설스럽지 않다. 즐거운 사랑이며, 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유희이다. 성과 욕망을 감추고, 다른 시선 속에 투과시키는 방식에서 느껴지던 불편함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육체와 욕망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과 욕망, 사랑에 대한 이 새로운 신화는 이처럼 성과 욕망, 인간의 몸을 전면에 내세워 이전까지의 가치에 대항하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증명해낸다. 무대 위에 여성의 몸, 몸을 통한 기쁨과 사랑, 욕망과 주체적인 인생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사라져갔을까. 타의적으로 성적 대상이 되어서, 혹은 성적 대상이 되기를 거부해서, 주체적으로 내 몸의 주인이 나임을 드러내서, 스스로의 몸과 인격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모진 바람을 맞아야 했던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무대 위에 몸을 통한 주체적 사랑, 솔직한 욕망의 표출, 스스로 선택하는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찬 여성 삶의 신화가 탄생하기까지는 그들의 몸과 숨이 남긴 자취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신화가 그랬듯, 앞으로의 신화는 지금 여기 살아있는 숨을 몰아쉬는 우리 몸의 자취로 거듭 새로 쓰이게 될 것이다.

 

 

작가의 글 - 안정민

 

<사랑연습-갈비뼈타령> <당곰이야기>의 첫 이름이다. 두번째 공연부터 <당곰이야기>로 명칭을 바꾸었다. <당곰이야기> 대본은 작가가 구상하고 완성했다. 그런데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연출가가 배우와 진행했던 다양한 연극 워크숍과 연극놀이로부터 작가가 여러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밝힌다. 작가와 연출이 동일인물이기에, 연출로서 배우와 함께 공연의 관점을 위한 워크숍을 퍼실리테이팅 하고, 작가로서 그것을 소화하며 공연을 구성했다. 예를 들면, 여러 한국 신화를 배우와 함께 다시 쓰기도 했고, 함께 여성서사를 읽고 여성의 삶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본을 위한 영감이 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특히, 대본 속의 대중음악 랩부분은 당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 직접 작사하였으며, 본 대본에 수록된 랩 가사는 저작권을 위해 작가가 출판용으로 일부를 다시 썼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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