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6대 혜공왕(765-780)때가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다. 신라에서는 역사상 최대의 범종을 구성하여 국대안민을 기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범종은 쉽사리 주성 되지 않는다. 마침내 오랜 노력 끝에 범종이 주성된다. 그러나 범종의 주성을 책임진 백제 출신의 장인 일전(一典)은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고자 완성된 범종을 깨뜨려 버린다. 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된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민심은 흉흉해 진다. 따라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범종은 빨리 수성되어야 한다. 마침내 장인의 딸 에밀레가 희생되어야 범종이 완성된다는 동요가 서라벌에 퍼지게 된다. 장인은 예술적 욕망과 육진의 여성으로 갈등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리치고 에밀레에게 도망하라고 한다. 에밀레 또한 갈등하다가 아버지에 대한 본능 같은 애정과 아버지의 소리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에밀레가 희생되어 범종은 주성되고 장인 또한 자신의 피로서 범종의식을 거행하며 희생된다. 종소리는 아름답게 완성되고 사람들은 평안과 기쁨을 얻고 나라는 제 질서를 찾게 된다.
"장인(匠人)의 魂" 이런 에밀레의 죽음은 과연 아버지를 위한 희생인가 아니면 종교적, 정치적, 속죄양인가? 무엇이 개인을 위하는 것이고 사회, 국가를 위하는 것인지. 역사는 우리에게 소리 없이 웅변해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남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는 건 올바른 사람이 취할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나 집단은 결코 생명이 길지 못하고 얼마 안가 무너지고 간다. 한 장인의 인생 행로를 통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하고, 작품의 완성을 위해 결국은 사랑하는 자식과 자신의 삶까지 희생하는 장인의 모습을 통해 예술가의 '혼(魂)'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품이다. '혼'을 위한 고귀한 삶의 희생이야말로 이기주의가 팽배해가는 이 사회에 대한 경종이요, 밑거름이 분명함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빨리 그러한 것을 망각하고 만다. 삶에 대한 아픔과 괴로움이 망각을 계측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혹여 이기심이나 배타적 타성에서 비롯되어 진 건 아닌지 우리 모두는 세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작가의 글 – 배봉기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것은 6년 전이었다. 그때 난 상당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고, 작품 의 출발도 그러한 절망에서 오는 「고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아이의 생명을 희생시켜서야 범종이 완성되었다는 봉덕사종(일명 에밀레종)에 얽힌 야사가 얼핏 강렬한 고통의 이미지로 떠오른 것이다. 고통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비극적인 희생이나 그로 인한 승화와 궁극적인 가치의 완성 등으로 변화되었다고 할까. 그러나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의 주관적인 감정상태는 여전히 탈고한 상태에도 깊이 남게 되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거의 탈 역사적인 시대의식이나, 주관적 정염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일종의 신비화는 당시의 내 정신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작품 쓴 이후 또 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 사고는 여러 가지 계기를 거쳐 상당히 변해 왔다. 우리의 삶이 보다 더 정치·사회적인 구조에 결부되어 있다는 인식이 점차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까. 사실 지금도 명쾌한 결론을 가진 것은 아니고 그저 막막한 길 위에 서있는 듯 느끼기도 하지만 이제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단순한 기쁨이나 작품의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던 간에 그것 또한 내 모습이었음에 틀림없고, 변명이 필요 없이 그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소간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막이 오르기 전의 무대를 바라보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막이 오르고 나면 어차피 작품은 내 손에서 떠나는 것이고, 작품의 위상 또한 내가 규정할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나로서는 다만 귀와 눈을 열고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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