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화된 자들(Cleansed)은 1998년 4월 30일 영국 로열 코트극장 일층에서 제임스 맥도날드 연출로 초연 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10월,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폴란드 브로츠와프 현대극단에 의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개막작으로 초청 공연되기도 하였다.
<정화된 자들>(1998)은<폭파>(1995)와<패드라의 사랑>(1996) 이후 탄생한 작가의 3번째 작품이다. 작가는 이전 작품에서 다루었던 사랑의 주제를 더욱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 속으로 몰아가는 한편, 전혀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며 표현의 경계를 확장시켜 놓는다. 대사는 케인의 이전 극들처럼 사실주의 연극의 설명적인 서사적 재현 대신, 우물우물 하듯이 혹은 자르듯이 파편적인 마디로 이어진다. 이어진 서사는 장면을 연출한다. 관객의 예상을 초월한, 상상 밖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오로지 사랑만이 삶의 전부인 자들의 극단적인 모습들로 관객의 의식을 도발한다.

이 작품은 오빠를 잃은 고통에 자신의 성을 바꿔 죽은 그가 되기로 결심한
젊은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흔한 멜로드라마에서 보는 달콤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건의 배경은 학교 건물을 개조한 병원이다. 학교에서 병원으로 변모한 무대는
규제와 규율이 지배하는 상징적 공간을 표현하게 된다.
여기에 의사와 환자들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이성이 규제해온 문명과 감성의
자유를 항거해온 개인들의 삶, 사회, 역사의 한 형태를 요약한다.
의사로 등장한 틴커는 권력과 제도권의 지배인물이며,
그 밖의 인물들은 제도로부터 제거되어야 할 개인들이다.
인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죽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은 이들의 존재보다
절대적이다. 이같은 두 세력, 두 다른 경향의 충돌은 오랜 서사의 주제였다.
이 작품의 특징은 그러한 주제를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간결함과 새로운 표현방식이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의식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식화의 매순간을 통해 공연자들은 상식을 깬 표현의 자유로움을 즐기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관객은 사랑의 진정성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공연이 관객이나 공연자에게 사랑에 눈을 뜨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 사랑은 그리운 사람일 수도, 이 공연이 열어 놓은 또 다른 표현의 가능성일 수도 있겠다.

대학의 밀폐된 ‘방’들을 색깔별로 변주하여 다양한 폭력과 애정 행위들을 펼쳐놓은 희곡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화려한 조명의 세계로 전화시킨 이 공연은 연극적이기보다는 시적이었다. 삼면을 반투명하거나 높은 흰 벽으로 둘러치고 안마대나 샌드백, 병원 침대와 샤워기들을 공존시킨 무대는 흡사 피나 바우슈 류의 탄츠테아터에서처럼 추상성이 극대화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인생’의 은유적 공간이었다.
“만일 네 인생에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넌 뭘 바꿀 거야?”라는 질문에 “인생”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극중 그레이스의 말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를 슬퍼하는 작가의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들린다. 깨끗하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결격과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인식이 사춘기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순간순간 접하게 되는 슬픈 진실이다. 이에 맞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연극은 모든 도덕적 잣대를 벗어버린 순전한 자발적 사랑의 순간을 제시한다. 성애와 동성애, 근친애와 복장도착 등, 다루는 소재들이 관객에게 친숙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보편적인 시적 진실과 함께 연극은 고전의 세계로 진입한다.

사라 케인(Sarah Kane, 1971 - 1999)
1971년 2월, 저널리스트인 양친으로부터 태어남.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 연극과 수석 졸업. 단 6개 작품으로 20세기 마지막 천재라 불리움. <폭파 1995>이후 4편의 작품<페드라의 사랑 1996><정화된 자들 1998><갈망 1998><4.48 사이코시스 1999>와 10분짜리 TV 드라마<스킨 1997>을 남기고 1999년 2월 병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함. 케인에 대한 연극사적 평가는 가정 내 문제나 개인일상사가 무대의 이야기 거리였던 당시 영국 연극계에 불을 지피며 새로운 극작가의 시대인 90년대를 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환멸과 모순에 가득 찬 삶의 현실을 더 이상 리얼리즘이 담아낼 수 없을 때 그녀는 폭력과 전율의 ‘뉴 브루탈리즘’으로 동면 상태의 극장을 깨웠다. 연극은 축구만큼이나 객석을 달구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연극은 폭력을 무대에서 난사하나 그 함축적인 이면에는 따스한 인간의 구원을 인도한다
관객의 눈앞에서 내던져지는 잔인한 폭력, 사지의 절단, 숨김없이 행해지는 자위행위, 강간들과 더불어 서정적인 시적 이미져리가 관객의 정서에 스며드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혼미한 미학. 스러져 가는 무의식을 설명이나 해석 없이 그대로 무대에 담아내는 것. 상상을 초월한 젠더의 유희. – 케인의 연극은 혼돈에 가득 찬 삶의 조건과, 사회와 인간에 붙어 있는 위선의 껍질을 도려내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무대 위에서 치러지는 하나의 제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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