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르그리트 뒤라스 '내 사랑 히로시마'

clint 2015. 11. 10. 08:59

 

 

 

 

 

 

<내 사랑 히로시마>는 누구나 아픔을 겪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로 인한 고통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식이 흐름처럼 모든 기억들은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로 떠돌아다닌다. 명확한 것은 없다. 괴로움, 쓰라림, 슬픔, 이런 감정들이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다. 아픈 기억들은 주인공들의 삶에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망령처럼 주위를 떠돈다. 그로 인해 그들의 미래조차 불분명하다. 일본인 건축가인 ‘그’와 프랑스 여배우인 ‘그녀’는 마치 세상의 끝에서 만난 듯 절망적이다.
히로시마에서 그녀는 고향 느베르를 떠올린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무엇은 잊어버린 것일까.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다.<내 사랑 히로시마>는 그런 점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또한 떠오르게 한다. 사랑을 느끼지만,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다가도 머뭇거리고 마는 두 남녀의 모습은 전쟁을 겪은 세대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승전국이 되었든 패전국이 되었든 포화의 중심에서 개인들은 아픈 기억을 가슴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그런 과거로부터,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와 그녀는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힘없는 개인들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육체, 재와 같은 이미지들, 땀은 젖은 나신,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그러나 화면은 역설적으로 히로시마의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병원, 박물관, 원폭과 관련된 사진들, 불탄 돌, 피부, 머리카락, 히로시마의 평화 광장, 초토화된 풍경, 벌레들, 다리가 하나 없는 개. 그런 도시에서 그와 그녀는 만나고 정사를 나눈다. 그러나 육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폭탄 한 방이면 몇 십만 명의 목숨이 사라지고 마는 세상에서.

 

 

 

일본인 건축가 ‘그’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불어를 배웠다. 프랑스 여배우인 ‘그녀’는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내일이면 프랑스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녀는 고향인 느베르에서의 아픈 기억 때문에 그와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2차 대전 때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던 그녀는 아기도 가졌었다. 그는 그녀에게 떠나지 말라고 얘기한다. 히로시마에는 원폭에 대한 악몽과도 같은 기억들이 여전히 떠돈다.
그는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묻는다. 사랑했던 남자는 프랑스인이었나? 그녀는 그를 만남으로 해서 아픈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사랑했던 남자는 독일군이었다. 헛간에서, 폐가에서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18세, 독일군 남자는 23세였다. 그녀에게는 즐거웠던 시간들이었다. 느베르에서 태어나고 자라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러나 첫사랑 남자는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지하실에 갇히고 벽을 긁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명예를 잃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차라리 딸이 사형 당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랐고,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와 파리로 겨우 도망친다. 그녀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모든 신문에 히로시마라는 이름이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히로시마에서 그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는다. 그는 그녀에게 히로시마에 머무르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녀는 안 된다고 거절한다. “당신이 느베르에서 죽었다면 더 좋을 뻔했어.” “맞아요. 난 느베르를 잊었어요.”
동이 트자 그는 그녀를 찾아 호텔로 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구의 반대편에서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히로시마는 당신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느베르야.” 두 사람의 기억은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뒤라스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아슬아슬한, 혹은 공허한 사랑이야기를 썼다. 원폭이 모든 것들을 앗아가 버린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백인 여자와 일본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기억들 때문이다. 두 남녀는 프랑스와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었지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감싸안아주지는 못한다. 아픈 기억, 기억하기 싫은 기억들이 두 남녀 사이에 연기처럼 흩날리는 것 같다.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아련함일까?

 

 

 

프랑스의 평론가 앙리 엔의 평론은 「내 사랑 히로시마」가 보여주는 '그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자기 자신 안에 감힌 채 불가능한 사랑을 하게 되는 등장인물' 등에 주목하면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세계의 근본주세가 '살아가야 한다는 권태' 임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특히 여자에게는 '살아가야 한다는 권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살고자하는 갈망의 부정적인 면, 대상이 없는 공동(空洞) 같은 생의 일면'인 이 권태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그래서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1914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사이공 근교 기아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내 사랑 히로시마'의 첫 시나리오를 쓴 것은 1958년이지만, 그녀를 이해하는 데는 1984년에 콩쿠르상과 리츠파리 헤밍웨이 상을 받게 한 '연인'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자전적인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내 사랑 히로시마'는 훨씬 문명 비판적이다. 여기에서의 '그녀'는 이미 「연인」에서의 소녀가 아니다. 30여세의 프랑스 여배우로서 평화에 관한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와서 한 시퀀스만을 남겨놓은 채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날 밤 한 일본 남자를 만난다. 작가는 그들이 만나게 된 상황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 대신 그녀는 첫 장면부터 둘의 정사를 전쟁과 연결시킨다. 제1부는 이렇게 시작 된다.
옷을 걸치지 않은 두 어깨가 서서히 나타난다. 머리 부분과 엉덩이 부분에서 잘려진 몸뚱이의 두 어깨만이 보인다. 그 두 어깨는 서로 껴안고 있는 데, 마치 잿더미 속에 혹은 빗속에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요는 이 이슬, 이 땀이 사라져감에 따라서, 증발됨에 따라서, 그것이 비키니 버섯구륜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연장하려면 연장할 수도 있을 일본 남자와의 사랑을 굳이 하룻밤으로 끝내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녀가 사랑했던 적국 독일군 청년과의 사랑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그 독일 청년과 그의 고향으로 가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해방이 되면서 그가 사살 당함으로써 좌절되고 그녀는 20세의 나이에 머리를 삭발당한 채 지하실에 갇히고 만다. 히로시마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그 지하실에서 나와, 환희에 찬 길거리의 인파 속에 섞이기에 적당할 만큼 머리가 자라 있었다. 작가 뒤라스는 그녀가 히로시마에 남아 달라는 남자의 부탁을 거절하는 이유한 다음과 같은 짧은 구절로 암시한다. "모든 사람들의 거부, 공통적인 비겁 성, 그들 사이에는 사실상 모든 것이 이미 끝난 것이다." 파괴적인 문명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랑은 끓어오르는 육체적 갈망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한다는 작가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리고 그 방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무서울 정도의 무력함 속으로 빠져들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리라. 그 방은 다시는 그들이 어지럽히지 않을 '사회의 질서' 그대로 그물 주위에 남새 될 것이다. 아무런 몸짓도 아무런 고백도 교환하지 않은 채로. 이와 같은 안목을 살려내자면 남자와 여자의 정사가 문명비판과 연결 되게 하는 최소한의 연결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듯싶은데, 연출자(채윤일)는 그것을 침대와 병풍, 침대를 변형시킨 몇 개의 의자들, 그리고 두 남녀 배우의 동작과 대사만으로 처리했다. 음향과 조명도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두 배우의 연기가 결국 큰 부담을 안게 된다. 40세의 일본남자와 32세의 프랑스 여인. 박정사와의 연기에서 한명구는 다소간 수동적이면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반면, 박정자는 다소간 능동적이면서 탐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뒤라스는 자신의 '요약’ 에서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한다.
단지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를 것이다. 무엇이라고? 느베르, 히로시마. 상호간의 눈에 비친 그들은 사실상 아직 아무도 아니다. 그들은 장소의 이름을 가졌을 뿐, 그 지명들은 지명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느베르에서 삭발당한 한 여인의 재난이 히로시마의 재난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 수 있다. 그녀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히로시마는 바로 당신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