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이스킬로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clint 2015. 11. 10. 08:51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인간들에게 나눠준 프로메테우스, 이 일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는 평생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게되는 끝없는 고통의 형벌 속에 갇히게 된다. 반면 불을 받은 인간들의 삶은 전보다 윤택해지지만, 오히려 비열함과 탐욕이 늘어만 간다. 또한 대장장이의 딸 이오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자신이 원하던 방랑의 길로 나아갔지만, 결국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운명과 프로메테우스를 저주하게 된다. 모든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는 인간들을 보면서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뜻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을 향한 애정과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매달린 암벽을 무너뜨려 프로메테우스를 영원한 어둠 속에 묻어버린다.
프로메테우스의 자유를 향한 의지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영원히 대립한다. 이 도전과 저항 그리고 사랑이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던지는 메시지이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낸 ‘힘’과 ‘폭력’이 헤파이스토스에게, 제우스에게 반항한 프로메테우스를 쇠사슬로 바위에 묶으라고 종용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선행 지식이 필요하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흙 속에 인류의 씨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흙을 강물에 반죽해 인간을 창조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제우스가 감춰둔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가져다준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불을 통해 원시 세계에서 문명 세계로 이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창조되고, 하늘에서는 새들이, 대지에서는 동물들이, 바다에서는 고기들이 생명의 노래를 불렀지만, 인간은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강물에 반죽해 한 형상을 창조하고 동물의 심장에서 선과 악을 취해 그 형상의 가슴속에 집어넣었고 영혼과 성스러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최초의 인간이다. 얼마 되지 않아 인간들은 대지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눈뜬 소경이었고 귀를 가진 귀머거리였고, 벽돌을 구울 줄도 몰랐고 나무를 깎아 집을 지을 줄도 몰랐다. 인간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음침한 토굴 속에서 살았고, 계절이 오고 가는 이치도 몰랐다. 그리하여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별들이 뜨고 지는지를 관찰하며, 어떻게 셈을 하고, 어떻게 생각을 서로 교환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짐승을 부리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병이 나면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배를 만들고 돛을 달아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가르쳤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별을 보고 새소리를 들어 미래를 예언하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던 인류의 스승이요 수호자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내쫓고 신들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거사에 일조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인간들을 모두 없애 버리려고 하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제우스는 인간들이 달갑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하면 그들을 말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신들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 나타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이 인간들에게 너무 과중한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과정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기지로 신들을 속여 넘기려 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잡은 황소의 고기와 뼈를 분리해, 고기와 내장은 먹기 힘든 밥주머니 속에 넣어 감추고, 먹을 수 없는 뼈는 먹음직스러운 흰 지방(脂肪)으로 싸서 가려 놓고 신들에게 마음대로 골라 먹으라고 했다. 고기의 맛있는 부분을 신들보다는 인간들에게 더 많이 먹이고 싶었던 프로메테우스가 계략을 쓴 것이다. 그의 속임수를 꿰뚫어 본 제우스는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흰 지방으로 가려 놓은 뼈 무더기를 골라잡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속은 것을 알아챈 듯이 시치미를 떼고 프로메테우스를 호되게 꾸짖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소행이 괘씸했지만 제우스는 그를 직접 벌하지 않고 프로메테우스가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불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 제우스는 인간들이 문명에 이르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불을 숨겨 버렸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올리브 가지를 꺾어 태양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 이글거리는 불길에 나뭇가지를 내밀어 불을 붙였고, 땅에 내려와 이 불씨를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 제우스는 화가 났지만 불을 도로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인간들에게 새로운 재난을 줄 궁리를 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여성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제우스의 명을 받은, 손재간이 좋은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들었다. 아테나는 이 여성에게 눈처럼 눈부신 옷을 입혀 주고 베일을 씌워 주었다. 머리에는 화관을 씌워 주고 금빛 댕기를 매어 주었다.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는 이 여성에게 재치와 말재간을 주었으며,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는 그녀에게 온갖 아름다움과 함께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교태를 선사했다. 그리하여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의 판도라가 탄생했다. 제우스는 온갖 재앙이 담긴 상자 하나를 판도라에게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한 뒤, 판도라를 인간들에게 내려 보냈다. 지금까지 이런 여자를 본 일이 없었던 인간들은 이 신기한 창조물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다가갔다.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주는 선물의 위험성을 미리 알았고, 동생에게 그 선물을 절대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해 형의 충고를 잊어버리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판도라는 어느 날 제우스가 준 상자가 생각났다. 제우스의 경고를 잊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앞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순간 상자 속에서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재난이 쏟아져 나오자, 놀란 판도라는 급히 뚜껑을 닫았다. 그리하여 상자 안에는 ‘희망’만이 남았고, 인간에게는 그 희망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이전까지 인간들은 어떤 고통도 모르고 지냈지만, 이때부터 인간은 영원히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 상자’는 인류의 불행과 희망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이 일이 끝나자 제우스는 자신의 명을 거역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했다. 그는 헤파이스토스와 시종인 ‘힘’과 ‘폭력’에게 프로메테우스를 스키타이의 황량한 벌판으로 끌고 가서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놓으라고 명하고, 매일 독수리 한 마리를 보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 헤파이스토스는 아버지 제우스의 명령을 마지못해 집행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와는 동족이자 같은 항렬에 속하는 신의 후예요 자신의 증조부인 우라노스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시작된다.
이 선행 신화에 드러나고 있듯이,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창조자이며, 인간들이 불을 통해 문명의 시대를 열게 했던 장본인이다. 또한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제우스의 명을 거역하고 독재에 항거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불굴의 의지로 기존의 권력과 독재에 항거하면서 자유를 수호하고 인류의 존엄성을 부각시키는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서막에서 ‘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헤파이스토스에게 프로메테우스를 사슬로 묶으라고 종용한다. “당신만이 피울 수 있는 불의 꽃, 문명을 여는 섬광(閃光)을 프로메테우스가 훔쳐 내어 인간들에게 넘겨주고”, 죄를 범했으니 신의 벌을 받아 마땅하고, 제우스의 권력에 복종해야 무사하다는 걸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제우스의 권력에 이의가 없다. 권력의 정당성과 부당성에는 관심이 없다. 권력이란 그저 복종의 대상일 뿐이다. 제우스의 명령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힘’은 권력에 굴종하는 군상들의 표상이다. 그러나 제우스의 아들인 헤파이스토스는 그와는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한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의 명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다소 미온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프로메테우스를 동정한다. “숭고한 뜻을 갖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테미스의 아들이여, 당신도 나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적막한 이곳의 바위에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쇠사슬로 묶어야겠소. …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인간을 사랑한 대가요. 당신은 신이면서도 다른 신들의 노여움을 겁내지 않고 인간들에게 과분한 영예를 베풀었소. 그래서 그 벌로 이 음산한 바위에 똑바로 선 채 무릎도 굽히지 못하고,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비탄의 소리와 헛된 신음 소리만을 내뱉게 될 거요. 제우스의 마음이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헤파이스토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하여 불을 훔쳐 그들에게 가져다준 행위를 숭고하고 정의로운 일로 받아들인다. 제우스의 명령을 수행하긴 하지만 앞서 보았던 ‘힘’과는 권력에 대한 상이한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파이스토스는 마지못해 제우스의 명을 따르기는 하지만 숭고하고 정의로운 일을 한 프로메테우스를 벌하려는 제우스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맹목적인 복종을 드러내는 ‘힘’과는 다른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동정적인 헤파이스토스에게 ‘힘’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님 명을 어기면 어떻게 되죠? 그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근심에서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어요. 제우스만이 자유로운 분이시죠.”
‘힘’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제우스에 대한 그의 복종도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에게 권력의 정당성과 부당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안락한 삶을 위한 굴종만이 있을 뿐이다. 오케아노스의 딸들로 구성된 코러스는 제우스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제우스는 새로운 법을 남용하면서 부당하게 올림포스를 다스리고 있어요. 이전의 합당한 법들을 무시하고 있어요.” “격노한 제우스는 계속 화를 내면서 하늘의 자손들조차 괴롭히고 있어요. 마음이 흡족해지기 전에는 화내는 걸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어떤 신이 계략을 써서 그의 통치권을 빼앗아 버리면 모르겠지만.”
독재자 제우스의 부당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코러스역시 제우스가 두렵다. ‘힘’도 코러스도 헤파이스토스도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독재는 이러한 두려움을 통해 작동한다. 여기서 제우스가 휘두르는 권력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복종하는 헤파이스토스는 비겁해서 미안한 인물이다. 그는 제우스의 부당함을 잘 알고 있지만 부자지간이란 운명의 사슬에 묶여 복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막강한 독재자로 군림하는 제우스에게는 합의에 기반을 둔 정당한 법조차도 무용지물이다. 제우스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한다. 정의와 불의는 그의 뜻에 따르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행위의 정당성과 부당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포기한 자에게 권력은 곧 정의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언젠가는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는 앞날을 미리 볼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내가 사슬에 단단히 묶여, 굴욕적인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의 왕위와 권위를 빼앗아 버릴 계략이 뭔지 알아내려고 반드시 날 찾아오게 될 거야. 하지만 달콤한 말로 꾀어도 난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날 협박해서 웅크리게 만들어도 알고 있는 걸 절대 누설하지 않을 거야.” 고통을 겪고 있지만 프로메테우스의 의지는 단호하다. 프로메테우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의 표상이다. 이 작품은 권력을 휘두르는 제우스를 영웅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항하여 고통을 자초한 프로메테우스를 영웅으로 제시한다. 즉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존의 권력에 대항하고 약자인 인간의 편을 드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우스의 전유물인 불을 훔치고 신들의 제왕을 기만하는 행위는 벌을 받아 마땅한 행위일 수도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도둑질’한 죄로 인해 수천 년 동안 사슬에 묶여 신음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 불을 훔쳤고 제우스의 명을 거역했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메테우스의 행위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행위는 불의와는 거리가 먼 행위다. 그가 훔쳐 낸 불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제우스의 정당성과 그가 표방하는 정의는 자신의 권력 체계 속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독재적인 가치다. 신적 정의와 인간적 정의의 대립에서 무엇을 따를지는 선택의 문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을 거역하고 인간을 택했다. 인간을 거들다가 제우스의 미움을 산 프로메테우스는 결박당해 수천 년 동안 수난을 당한다. 바위에 묶인 채 강렬한 햇볕을 견뎌야 하는 고통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은 참기 힘든 수난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억압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다. 독수리는 독재자 제우스의 명을 받아 몸의 가장 약하고 예민한 부위인 간을 쪼아 먹는다. 그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독재 권력은 항상 인간의 가장 약하고 아픈 부분을 파고들어 괴롭힌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수난과 고통은 독재 권력과 신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장치다. 나아가 그의 수난은 인류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수난과 유사하다. 예수의 수난을 통해 인류가 구원되었듯이 프로메테우스의 수난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신적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복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우스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항했던 용기 있는 인물이다.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거부하고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부당한 권력에 맞섰던 인물이다. 프로메테우스의 행위는 신탁에 의해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려 했던 오이디푸스의 행위와 유사하다. 프로메테우스도 오이디푸스도 운명의 사슬에 묶이고 운명의 그물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울림과 공명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이디푸스는 진실에 이르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도 운명처럼 작용하는 제우스의 명을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제우스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변함없는 인간 사랑을 실천하며, 고통스런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이를 감내한다. 제우스로 대변되는 신적 질서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우스가 표방하는 정의와 프로메테우스가 따르는 정의는 서로 다르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두 개의 서로 상이한 개념의 정의가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제우스에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과 인간을 벌하는 게 정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정의다. 또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全能)한 신 제우스와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전지(全知)의 프로메테우스는 서로 대립한다. 영웅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고 사는 독수리를 죽이고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까지 전지와 전능은 서로 대립한다. 전능과 전지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성(神性)은 완전할 수 없다. 전능은 전지를 통해, 전지는 전능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며 완전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신성의 기본적인 속성인 전능과 전지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제우스가 대변하는 전능과 프로메테우스가 대변하는 전지는 서로 분리된 상태에서 완전한 성취에 이를 수가 없다. “전능은 전지 없이는 그 자체를 파멸시키고, 전지는 전능 없이는 고통을 당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1) 제우스는 전능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제우스가 자신의 앞날을 모르고 자신을 파괴할 인물을 낳게 될 메티스2)와 결혼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프로메테우스는 전지하지만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권력의 힘을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의 앞날을 미리 알고 있지만 그 스스로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고통과 수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능과 전지의 결합은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화해로만 가능하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종막은 이 둘의 대립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신화에서 이 둘은 헤라클레스의 출현을 통해 마침내 화해하는 것으로 처리되고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독수리를 죽여 프로메테우스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헤라클레스의 행위에는 제우스의 의지가 작용한다.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 마침내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고 사는 독수리를 죽였을 때, 자식인 헤라클레스의 위업을 기뻐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사슬에 묶인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전능과 전지는 화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둘의 진정한 화해와 결합이 성취되었을까? 제우스는 제우스일 뿐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다.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일 뿐 제우스가 아니다. 이 둘의 화해는 피상적이며, 둘은 마지못해 화해한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제우스에게 구현된 독재와 프로메테우스로 대변되는 자유는 영원히 대립하는 성질의 것이다. 자유롭기를 원하는 자를 응징함으로써 독재는 독재를 공고히 하려고 하고, 자유에의 열망이 쉽게 응집되어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권력의 부정적 모습이 제우스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제우스는 그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정의와 불의의 경계를 설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불경과 불의라는 이름으로 처벌하는 독재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행위를 불의라고 단정하는 제우스의 판단은 자신의 권력 안에서만 통용되는 가치다. 그 권력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는 말이다. 독재의 종식에는 항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와 고통을 감수하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명체도 고통을 겪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고통 받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감내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이다. 부당한 권력 앞에 조아리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의 용기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질이 아니다. 영웅의 자질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고통 받는 자에 대한 배려이고 고통을 견디는 용기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독재에 대항하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그가 겪은 수난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추앙을 받는 영웅으로 살아남는다. 인간을 위해 프로메테우스가 알면서도 당하는 고통은 용기 있는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적인 키를 높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상연되었던 시기에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주창했던 페리클레스의 다음 말은 독재와 자유, 그리고 용기라는 덕목을 두고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자유의 비밀은 용기다. …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달콤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쓰라린 고통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