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명화 '냉면 - 침향외전'

clint 2023. 4. 18. 19:45

 

극중 작가 '난희'는 최근의 한반도를 둘러싼 종전, 평화 무드에 자연스레 이모를 떠올린다. 그녀는 10년 전 <침향>이라는 작품에서 월북한 남편을 둔, 굴곡진 삶을 살다 간 이모 애숙의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다.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정국의 기쁨이 전쟁의 포성 속으로 빠르게 사그라들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삶을 살던 민초들은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당했던 슬픈 역사다. 작가는 '권리장전 2018 분단국가' 축제에 참가해 보라는 후배의 권유를 받고 '냉면-침향외전'을 써내려간다. 이번에는 요양병원에 누워 딸래미는 기억에서 지웠으면서도 여전히 동생 애숙을 그리워하는 난희 엄마의 안타까운 모습 또한 작품의 한 장면이 된다.
Part 1- 배우들은 분단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를 모색하고 더듬는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와 그에 얽힌 이산가족의 개인사 및 그와 연관된 작품 등 다양한 소스가 언급된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 분단을 넘을 것인가? 냉면으로.
Part 2 - 가장 맛있는 냉면에 대한 이야기가 배틀로 진행된다.
Part 3 - 비무장지대 답사기. 작가는 분단의 상처를 보다 생생하게 상상한다.
Part 4 - 맛있는 냉면을 이산가족에게 대접한다.

 


 연극 ‘냉면’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침향외전’이다. ‘침향’은 ‘냉면’의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극단 ‘난희’를 만든 김명화의 작품인데, 2008년에 공연됐다. ‘침향’으로부터 10년이 흘렀다. 10년 사이에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종전국가로 모습을 바꾸려 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침향’은 ‘냉면’에 끼어든다. 그렇다고 ‘침향’을 알아야 ‘냉면’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무대엔 벽이 하나 세워져 있다. 벽 왼쪽에 조그만 칠판 하나가 조명을 받고 있다. 작은 극장에 관객들은 포화상태다. 극이 시작되면 실크햇을 쓴 남자가 나온다. 남자는 실크 햇에서 쪽지를 꺼낸다. 생쥐나 비둘기는 쉽게 넘어 다니지만 사람은 쉽게 넘어 다니지 못하는 끔찍한 이것이라고 한다. 그 종이에는 ‘분단’이라고 단어가 적혀 있다. 처음부터 홀로 조명을 받으며 관객을 맞았던 칠판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우들은 이 칠판에 주제어를 적어 가며 연극을 만들어 나간다. 극은 다큐멘터리인가 싶게 한국 근현대사를 죽 짚어 나간다. 순간 관객들은 작가역을 하는 배우2의 학생들이 되어 연극을 따라간다. 진짜 수업처럼 하품하며 졸려 하는 관객도 있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업이되 딱딱하지 않다. 작가는 자신의 이모를 연극으로 끌고 들어온다. 이모를 리얼 소스로 만들었던 ‘침향’의 애숙과 ‘냉면’의 이모가 겹쳐지고 애숙과 이모는 둘 다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애숙은 잠깐 선을 넘었던 남편을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이모는 북으로 간 남편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다. 온통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냉면’에서는 당연히 냉면 이야기를 많이 한다. 대한민국을 냉면을 중심으로 잘 형성해내었다. 백석의 시 ‘국수’와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만나야 하고 만나고 싶으나 만나기 힘들어진 사람들을 위한 오브제로 충분히 활용되었다. ‘침향’의 애숙과 ‘냉면’에 나오는 작가의 어머니(월북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이모의 동생)는 치매에 걸린다. 치매에 걸려서 일정 기간의 기억이 없지만 한 지점에 있는 특별한 기억은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숙이 그렇고 이모가 그렇고 작가도 그렇고 어쩌면 관객들 중 누군가도 그렇다. 다 잊어버린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그것. 연극 ‘냉면’의 칠판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신기루’다. 북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 없는 이모부와 그 이모부를 기다리다가 결국 만나지 못한 채 운명한 이모가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뿐인 딸 경숙(작가의 사촌 언니)이 대접하는 냉면을 맛있게 먹는다. 경숙은 생전에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고생으로 일관하다 삶을 마감한 어머니가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물냉면 한 그릇을 다정히 나누는 모습을 보며 백석의 시 ‘국수’를 판소리 가락으로 노래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거늘. 사랑하고, 손잡고 함께 길을 걷고, 한 그릇 맛있는 음식으로 더위를 같이 이기고.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클래스'  (1) 2023.04.20
이재상 '물의 기억'  (1) 2023.04.19
정복근 '첼로'  (1) 2023.04.18
정경환 '옷이 웃다'  (1) 2023.04.17
이재상 '삼거리 골목식당'  (1) 20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