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경환 '옷이 웃다'

clint 2023. 4. 17. 21:49

 

옷 수선을 하는 자숙. 70년대 봉제 공장 시다로 생활하며 쌓아온 실력 덕에 수선집을 찾는 손님이 많다. 음악학원을 하며 성악가를 꿈꾸는 벨칸토 박, 의문의 귀부인 영지 여사, 명품 카르텔 매장의 주인 여자, 매번 여자 옷의 수선을 맡기는 호남자(?)가 자숙의 단골들이다. 자숙의 고향친구 자영은 하는 일 없이 자숙의 가게를 들른다. 자영은 남자에게 맞고 살면서도 당당하다. 옷수선 집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어가자 자숙에게도 무료함이 찾아온다. 옛 시절이 그리워진 자숙은 같이 차렸던 의상실의 디자이너, 두식 오빠를 떠올린다. 오빠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자숙, 손님들은 하나같이 자숙의 드레스를 욕심 낸다. 하지만 드레스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자숙. 드레스의 주인은 과연 누가 될까?

 

 

극중 주인공인 자숙이가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배운 밥벌이가 의상실 시다였다. 자숙은 어린 소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행금지를 넘기면서 '오줌 눌 시간도 없이 옷 만드는 일의 보조를 해야 했다. 급습하는 잠을 물리치기 위해서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옷 먼지 그대로 폐로 들이키면서 수출산업 역군이 되어야 했다. 그녀들은 거두어야 할 어린 동생이 있고 시골 부모님에게 적은 돈이라도 부쳐야 하는 가장들이었을 것이다. 교복을 입고 싶어서 산업체 학교에 다녀야 했던 그때의 공돌이 공순이들의 밤샘작업이 한국의 경제부강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하여 <옷이 웃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 산업화라는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근대 산업화 시기 수출역군이 되어야 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또 이 작품에서 자숙은 태어나 모든 것을 처음으로 같이 해본 사랑하는 남자와 의상실을 하면서 꿈을 키워 나간다. 의상실 화재로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후 혼자 옷 수선을 하면서 늙어간다. 남자가 죽었으니 의상실을 계속 유지하며 옷을 만드는 일이 힘들어진 것이지만 무엇보다 기성복이 유행하면서 의상실을 밀어낸 것이다. 일일이 치수를 잴 필요 없이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옷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싼 가격으로 편리하게 소비자에게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재단사, 시다. 가봉 등 전태일의 시간을 떠돌아다니던 우리의 언니와 누나들의 언어가 기성복의 등장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여 주인공 자숙은 더 이상 자기의 옷을 만들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옷을 고치는 일로 하루를 살아가면서, 과거 옷을 만들었다는 기억만으로 삶의 위안을 삼는다연극에서 인물들의 등장은 무대 위에서 사건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옷이 웃다>에서는 사건을 뚜렷하게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옷 수선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선 볼일을 마치면 그대로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린다. 연극에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의상실에 화재가 났을 때 불에 타는 옷을 찾으러 불길에 뛰어든 남자가 죽어버린 일이다. 이는 자숙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 재현되는데 일상이 반복되는 극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을 통해서 관객은 자숙의 과거를 이해하게 되고 옷 수선을 하게 된 동기를 이해하게 된다.

 

 

작가의 글 정경환

사람은 왜 옷을 입을까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아니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옷을 입는 이유가 무엇이 됐든 옷은 그냥 옷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옷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옷으로 채우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현대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은 잊은 채 옷에서 자신들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옷의 완성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맞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다. 진정한 옷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구나 옷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 아픈 사연을 가진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픔을 감추기 위해 옷 뒤에 숨이 살고, 다른 누군가는 아픔을 잊기 위해 자신만의 옷을 만든다. 진정 자신에게 맞는 옷을 알기 위해 옷 수선을 하는 사람들. 새 옷을 사는 것보다 고쳐서 나에게 맞게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스스로 무능하고 상처투성이에 부족한 인간이지만 자신을 자책하며 새롭게 태어나길 기도하는 것보다, 조금씩 고쳐서 부족을 배우며 세상을 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옷 수선하듯이 말이다.

 

정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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