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백남 '아내에 주린 사나이'(단막)

clint 2023. 4. 13. 08:51

 

 

<아내에 주린 사나이>(『삼천리』 4 5, 1932.5)는 도시를 배경으로 가장의 장애와 부부 사이의 갈등을 극화한다. 이 작품에서의 갈등은 가장의 성적장애(性的障碍)에 의한 것이다. 은행의 전무 고유풍은 성적장애에 의해 아내 박영무에게 이혼을 요구 받는다. 음악회 연습으로 아내가 외출한 이후 부인잡지사의 여기자인 문봉희가 영무를 찾아 방문하자 고유풍은 문봉희를 맞아들여 그녀를 금권으로 유혹한다. 악보를 가지려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한 박영무는 남편의 허위를 꼬집고, 고유풍은 하인에게 세간을 정리하게 하고 가정의 '파산'을 선언한다.

 

부제가 '파산'인 이 희곡은 '어느 해 늦은 봄'을 시간적 배경으로, '양옥住宅'의 화려한 내부를 무대공간에 형상화하고 있다. 피아노와 탁자, 전등, 홍차그릇, 서양의장과 재봉틀, 축음기, 소파 등 작가는 무대 공간을최고조도로 화려하게꾸밀 것을 지시한다. 이 작품에서 부르주아 가정을 형상화하는 이러한 오브제들은 가장 고유풍의 경제적 능력을 상징한다. 화려한 무대공간과 그 상징적 의미는 초기작 <국경>에서 안일세의 가정에 산재된 '박래품을 통해 부르주아 가정을 형상화한 시도와 유사하다. 부르주아 가정의 비판적 극화뿐 아니라 남성 가장의 은행의 중역으로 설정된다는 점, '신여성' 아내의 저항과 갈등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초기작 <국경>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국경>에서 부르주아 가정의 비판이 봉건적 남성하인 점돌의 대사에서 소비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여성평등권, 가정개량론에 대한 적대감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아내에 주린 사나이>에서 박영무가 부르주아가정을 비판하는 핵심에는 소비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보다는 정신적인 사랑과 대비되는 육체적인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자리한다. 박영무는 자신이 주장하는 부부의 '사랑', '물질'로 보여주는 사랑, 부모간의 사랑과 구별하면서도, 박영무는 '문화주택'으로 상징되는 화려한 삶이 고유풍의 성적 불구를 감추기 위한 '간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음악회의 준비 때문에 자동차를 대기시키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홍차를 즐기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녀가 지적하는 부르주아 가정 비판은 표면적으로는 '간판'으로서의 경제적 풍요를 문제시 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성적 무능이라는 고유의 '남편 노릇'을 더욱 중요하게 문제 삼는다. 이 과정에서 부부갈등의 원인은 '물질'의 노예 혹은 경제적 풍요의 간판에 숨어 있는 '육체적 성()'의 문제가 된다. '육체적 성'을 둘러싼 등장인물의 극적 갈등은 아내의 외출준비를 바라보는 고유풍의 행위에서 읽을 수 있다. 희곡에서 지시된 박영무의 나이는 스물여덟이며, 박영무는 고유풍의 네 번째 아내로 설정되어 있다. ‘화장이라는 여성 고유의 행위가성적 타락을 은유 한다는 점, 극적 갈등의 중심에 아내의 성적 매력에 대한 불안감, 외도에 대한 분노가 잠복해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고유풍의 의심, 아내의 외도사실은 극이 마무리될 때 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은 아내의 화장 이후, 목소리로만 들리는 박영무와 낯선 남자(韓醫師)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외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윤백남

 

아내의 외출 이후, 고유풍은 박영무를 유혹하였던 '물질로 집에 방문한 여기자를 다시금 유혹한다. 여성잡지사를 세워주겠다는 고유풍의 유혹에 무너지는 '직업여성' 문봉희의 형상화에서는 물질적 유혹에 약한 여성이라는 '모던 걸을 바라보는 작가의 부정적인 시야가 투영된다. '누명은 이미 듣고 만 것이니 속히 결혼해야 한다'는 여기자 문봉희의 대사는 '직업여성'에 대한 비판적 형상화의 정점에 있다. 결말에서 박영무는 고유풍과 문봉희의 만남을 발견하고 부르주아가정 안에서 남편의 진열창으로 살아가는 아내 "후보자를 골라 놓은 고유풍의 허위의식을 비꼰다. 부르주아 가정에 편입하는 신여성이 남성의 진열창으로 네 번째 아내, 다섯 번째 아내가 되는 사슬의 구조는 고유풍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고유풍이병신이란 말을 숨기기 위해서 많은 여자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결말은 극 구조상 이전에 예비되지 않은, 무리하게 설정된 상황이다. 부르주아 가정을 상징하는 무대 위의 화려한 오브제, '물질'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라고 지시하는 고유풍의 대사로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작가 윤백남은 작품의 전면에 드러난 부르주아 가정의 모순, ''의 모순을 은폐하였던물질을 폐기하는 결말의 장면을 통해 부르주아 가정의 정신적 파산을 형상화 하고자 시도한다. 또한 부르주아 가정 내부의육체적 성()'의 갈등과 성적 매력에 대한 남편의 질투를 그려 넣는다. 아내 박영무가 비판하는 부르주아 가정은 소비의 메커니즘 자체가 아닌, '물질'이 가정의 내적 모순, 가장의 성적 무능력을 은폐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지점에만 국한된다. 박영무는 부르주아의 가정의 모순을 공박할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으나, 그녀 역시 '물질'의 풍요를 즐기며 외도의 가능성을 드러내 놓고 있는 '신여성'으로 그려지기에 부르주아 가정의 모순은 ''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다. 작품의 결말에서 남성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통해 가정 붕괴의 형상화로 모순이 폭로된다. 결말에서 고유풍의 '깨달음'은 구성상 치밀하지 못한 극 구성상의 결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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