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삼식 '주공행장'

clint 2023. 4. 1. 07:54

 

 

칠순 노인 주호는 삼거리주막의 난영이 챙겨준 주합을 손에 들고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즐겁다. 오늘은 주호의 일흔 번째 생일이다. 달콤한 술맛을 느끼면서 주호는 자신의 행장을 읊어나가기 시작한다. 애주가인 주호의 아버지 국경음은 오늘도 어린 주호를 앞에 앉혀 두고 술과 함께 세상을 논하느라 정신없다. 세상의 모순과 정책의 폐단은 경음의 주된 안주거리가 된다. 어린 주호는 영문을 모른 채 연신 하품이고, 주호의 어머니 심씨는 이런 풍경이 못마땅하다. 한편 궁중연회 자리는 넘치는 술잔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술이 거나해 가면서 모두들 그동안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무수리 출신인왕의 생모묘를 궁이라 높여 부른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터져나오자 왕은 분개한다. 그동안 술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이를 생업으로 삼는 백성들이 있어 금령 시행에 신중 하려 했으나, 오히려 세도가들이 금령을 어기면서 백성들의 생업을 빼앗고, 그런 자들이 원칙을 내세워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 왕은보다 가혹한 금주령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많은 이들이 이러한 금령을 어겨 죄를 입게 되고, 여기저기서 금령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주호의 아버지 경음 역시 금령의 폐단을 고하려고 애쓰지만, 주호가 열 살 되던 어느 봄날 주호에게 한동이 술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주호는 그 자리에서 술단지를 들이켜고 웃음과 울음에 취하는데, 사람들은 주호가 실성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좌중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상여를 돌려 금령의 부당함을 고하기 위해 왕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막상 왕이 술병을 내려놓자 두려움에 아무도 선뜻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그 술을 주호가 병째 들이켠다. 이 일로 주호는 어린 나이에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모두들 주호와 경음이 선비의 기개를 떨쳤다고 추켜세우며 주호에게 훗날 더 큰 일을 도모할 것을 강권한다. 어린 주호는 자신이 겪은 많은 일들 사이에서 혼란스럽지만, 관비인 난영이 이런 주호를 감싸고 돌봐준다. 난영은 술을 빚어주고, 이태백의 시를 자신의 것인 양 읊어대는 주호를 믿어주며 늘 그의 시에 감탄한다.

금령의 시행과 처벌이 더욱 강화된 가운데 왕의 최측근인 윤현이 음모가 의심되는 음주사건에 휘말리고 대신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왕은 윤현의 목을 쳐 오히려 강한 본보기로 삼는다. 청년이 된 유배지의 주호는 왕에게 술한잔을 권하여 왕이 그것을 마시게만 된다면 금령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잠시 잊고 지냈으나 어린시절 왕과 마주했던 순간 얻었던 자신의 평생의 업이라고 여긴다. 이때 어머니 심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주호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고, 삼년상을 마친 뒤 드디어 의관을 정제하고 술상을 든 채 왕 앞에 나서게 된다. 궁 앞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주호 앞에 왕이 등장한다. 왕은 주호가 십년전 자신의 앞에서 술을 마셔 유배를 보냈던 그 어린 아이임을 알아본다. 호통을 치는 왕에게 주호는 권주시를 읊으며 술을 권하고 이를 들은 왕은 터진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 좌중 사이에서 갑자기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진다. 주호는 그 일로 옥에 갇혀 말술을 먹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다. 하지만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주호는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주호는 왕이 자신의 술잔을 받고 환하게 웃음짓고 떠났다고 믿는다. 이로써 자신의 평생의 업을 이룬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칠순의 주호, 난영과 함께 어린시절에 이야기를 나누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월과정을 함께 나눈 아들의 시간은 따뜻하기만 하다.

 

 

영조 연간 조선 사회에 내려진 금주령,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지만 천한 무수리 소생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근심해야 했던 왕과, 그러한 왕의 내면적 고뇌를 읽어내고 자신의 일생을 걸어 한잔 술 권하기에 도전했던 주호의 이야기는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따뜻하고 인간적인 교감을 그려낸다.

酒公行狀의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지만, 실제로는 쓰는 이에 의해 아름답게 포장되어 남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동시에 지닌 글이기도 하다. <주공행장>은 노인 주호가 해설하듯 회상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을 통해 진행되면서, 행장과 같이 극의 안팎에 혼재하는 진실과 거짓이란 명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역사적 배경을 소재로 하고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빚어낸 유쾌한 극적 전개는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공방이나 여러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 따뜻한 인간애와 훈훈한 웃음을 준다.

 

 

작가의 글 배삼식

15년 전쯤 봄날 아침에 신림동 어느 다리 아래서 눈을 뜬 적이 있습니다. 하늘은 코앞에 낮게 내려와 있었고 보슬비가 간지러웠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귓가에 간지러웠습니다. 간밤의 일은 깜깜하기만 한데 발에 있어야 할 신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맨발로 질척한 개천을 따라 걸으며둑 위로 올라갈 길을 찾았으나 환속할 길은 막막했습니다. 그러니 이유는 알 수 없으되, 간밤에 내가 다리 위에서 이별천지위로 분연히 도약, 비상하였고 그전에 홍진을 끌고 다니던 신발을 벗어두는 예까지 갖추었음이 차차로 분명하여졌습니다. 털끝 하나 상함 없이 내 몸을 안착한 주덕을 칭송하며 가파른 석축에 매달려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바퀴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달려가는 포도 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 취중에 저질렀던 온갖 어이없는 망나니짓을 생각하면 쓴웃음만 나오지만 한편으로 그때의 객기가 흐뭇하기도 합니다. 다리 아래서 눈을 뜨던 순간의 그 고즈넉함을 떠올리고 내가 전혀 기억 못하는 도약과 비상의 순간에 느꼈을 전율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지나친 예()는 편벽됨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은 예의 본뜻(大禮)이 아니라 합니다. 질서가 필요한 만큼 인간에게는 무질서와 혼란 또한 필요합니다. 깨끗하고 깔끔한 것도 좋지만 가끔은 어지르고 더러워짐으로써 숨통이 트일 때도 있습니다. 필요악이란 단어를 저는 숨 쉴 구멍이라는 말로 번역해 봅니다. 술이라는 물건의 품은 워낙 넓고 가없어서 한 마디로 꼬집어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이 이야기에서 제가 염두에 둔 것은 대략 위와 같은 뜻에서의 술이었습니다. 예를 벗어난 모든 행위에 대해 감시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요즘, 무질서와 혼란을 옹호하는 이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예()의 적용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며, 지나친 예는 또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지(李耔)는 김시습의 <매월당집>에 서()를 붙이면서 '남의 콧김을 우러러보고서 기쁘고 슬픈 일을 삼는다.” 했으니 지금의 제 처지가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술의 참 맛도 모르는 자가 옛사람들의 몇몇 자취를 빌어 서툰 이야기를 지어내니, 이 이야기가 막걸리 한잔 만큼이라도 흔쾌할는지요. 이 이야기를 붙들고 고심하며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었으나 아직 술은 채 익지 않은 듯하니, 술독을 여는 마음이 난감하기만 합니다. 더딘 글을 믿고 기다려 주신 손진책 선생님과 배우, 스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배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