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하기 위해 거절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던 그 시절.
반짝하기도 뾰족하기도 했던 17살.
34살의 리아, 선주, 현, 미소. 17살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결코 적확히 기억해낼 수 없는, 그 때의 우리를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노력.
그 때 너는 어떤 애였을까. 무수하게 스쳐 지나갔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제는 잊혀버린 너와 나를 다시 기억한다.
그 때 잠깐 스쳐갔던, 그렇게 소문 나 있던, 그 시절 너와 나를 위해.
리아는 맨날 운동장에서 뛰는 현에게 사랑에 빠진다. 근데 뭐? 거절을 못해?
“너.. 거절을 못 해?" 현의 진짜 마음을 알기 위해 시작된 [제1강 : 거절하는 방법]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학교에 친구가 없었던 선주, 미소처럼 웃지 않았던 미소, 페이스를 찾는 데 집착했던 현,
우리 거절하는 방법만 알면 다 해결되겠지?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그때 우리가 원했던 건,그리고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그나저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제1강: 거절하는 방법>은, 서른네 살의 네 사람, 리아, 현, 미소, 선주가 열일곱 살의 자신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여자 좋아한다고 학교에 소문나 있는’ 리아, 자기 페이스를 찾기 위해 언제나 달리는 현, 이름처럼 미소짓기가 싫어 언제나 웃긴 표정을 짓는 미소, 공부는 잘하지만 학교에선 친구가 없는 선주. 어느 날 운동장을 달리던 현에게 리아가 반한 것을 시작으로 네 명의 여성 청소년들은 거절하는 방법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네 명의 여성 청소년들은 어떤 유형에 갇히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대 위를 뛰어다닌다. 친구와 가족, 학교를 넘어선 세계를 상상하기 힘든 청소년 시기에 대한 섬세한 재현에 기반한 이 작품은, 그럼에도 결코 작지 않은 세계를 보여준다. 청소년의 퀴어성과 그들을 둘러싼 소문은 폭력적이고, 어른들의 태도는 그들을 미묘하게 괴롭힌다. 여성-청소년이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을 가진 이들의 거절은 온전한 거절이 되지 못하고, 말은 힘을 갖지 못한다. 극단 Y는 이전 작품에서 그랬듯 이 작품에서도 여성 청소년을 대상화하지 않은 채 그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리아는 성폭력의,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2차 가해의 피해자이지만 작품은 그를 피해자성에 가두지 않는다. 실컷 울게 하고 자책하게 한 후 다시 일어서게 한다. 작품은 그들이 가진 겹겹의 정체성 가운데 어느 것을 부각시키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다만 존재하게 한다. 그들은 그들이다. 피해자일 수도, 전사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채로 그들이다.
열일곱의 그들이 배워야 하는 것이 ‘거절’이라는 것은 이 연극의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은 평생에 걸쳐 배워나가야 하는 일이라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은 남의 마음, 아니 때로는 내 마음 같지도 않은 내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아무래도 녹록지 않다. 나의 단호한 거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거절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는 허락만큼이나 많은 거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열일곱의 친구들은 그것을 배워나간다. 그들의 강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허락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나는, 그리고 친구들은 서로의 진심을 주고받는 첫걸음을 뗀다. 거절하는 것이 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거절한다는 것이 남을 상처 주는 것과 언제나 같지 않음을 우리는 열일곱에 배워야 했다.
작가의 글 - 강윤지
어딘가에 서서 그 때의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제법 고통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전히 종종 스스로를 미워하고, 한 번의 거절이면 관계가 끝날까 두려워하고,
나의 불편함을 삭이는, 나약하고 초라한 마음들로 가득 차 있다.
<제 1강: 거절하는 방법>에는 '거절'에 대한 다양한 곤란들을 숨겨났고,
그로 인해 어쩔 줄 몰라하는 몸짓과 소리들이 발생하고, 또 그것이 관계에 영향에 미친다.
사랑과 우정, 미움 안에 놓였던 ‘나’는 무수한 시간 속에 다시 놓여진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여지기도 했고, 소문 속에 휘말리기도 했고,
그 소문에 동조하기도 했고, 마른 침을 삼키며 언어를 골라내다가도,
몰래 이불보에 눈물을 적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스쳐갔던, 앞으로도 스쳐 지나갈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인사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아주 잠깐 맞닿았던 사람들, 지금은 뿌연 기억 속에 있지만,
아주 잠깐 마음을 다해 만났을 그 순간의, 좀 더 제멋대로 살고 싶었던,
좀 더 멀리 뛰고 싶었던 그 때의 나와 너. 잘 지내고 있을까.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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