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날과 다름없는 온수고등학교의 아침 자습시간.
'홍콩 액션배우 견자단'의 오타쿠로 유명한 민국을 괴롭히느라 정신없는 용철과 동수.
짝사랑하는 윤선마저 자신을 외면하자 좌절에 빠진 민국.
그때, 민국의 교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서른세살의 이대한!
그는 팔뚝만한 사시미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른다.
"한민국 나와!!!"
일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모두의 시선이 민국에게 쏠리고, 드디어 민국의 입이 열린다.
"이 신성한 학교에 찾아와? 이런 무례함은 용서할 수 없다..."
조용하던 온수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이대한과 한민국의 난투극!
학교는 곧 아수라장이 되고 출동한 경찰들은 교실 앞에 진을 치는데...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친구들에게 강해 보이고 싶어 돈을 주고 가상 난투극을 모의하려는 고등학생과 단돈 5만원에 그 난투극에 동참하게 되는 30대 청년'의 실화, 그리고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대한민국 난투극>! 유쾌하고 황당하지만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청년 '대한'과 학생 '민국'의 이야기!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남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웃픈 자화상이다!
4년차 9급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대한'. 교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친구들로부터 놀림 당하는 '민국'. 현재는 고단하고 미래는 불투명한 청년들, 청소년들이 떠오른다. 연극은 이 두 인물에 '무술'과 유투브를 덧붙여 이야기를 엮어간다. 빈털털이 취준생 대한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무술을 다루는 유투브 채널을 구독하는 것이고, 민국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것은 홍콩무술영화 스타 견지단을 흠모하면서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며 무예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사건은 '대한'과 '민국'의 난투극에 도달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대한은 하필 아우디 옆에서 발차기를 연습하다가 사이드밀러를 부러뜨린다. 수리비 50만원을 물어주기 위해 노래방(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술을 팔고 도우미를 들이는 주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2차를 나간 손님의 차를 모텔 주차장에 옮겨 놓는 일은 꼬이고 꼬여 대한은 경찰과 함께 가게에 들어서고 만취한 고2 민국은 오바이트를 하고 있다. '액션활극'을 표방하는 연극답게 무대에서는 종종 바람을 가르며 휘돌아 올라 멋지게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연극에서 전개되는 무예장면은 유투브 방송 장면이거나 대한과 민국이 자신들의 비루한 현실에서 그려보는 판타지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대결은 대한과 민국의 난투극이 유일한데, 이들의 난투극은 그 판타지를 현실에서 '재현'해보고자 했던 것. 당연히 판타지는 현실에서 실현되지도 재현되지도 않는다. 두 인물이 얽혀들어가는 사건의 짜임새, 무예로 펼쳐지는 무대 위의 판타지 등이 긴장감과 활기를 만든다. 무예판타지의 활기는 단지 볼거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거리'를 만들어내고, 그 거리 즉 떨어져 본다는 것이 어떤 위안을 주기도 한다. 슬프거나 아픈 현실도 우리는 떨어져 웃으며 볼 수 있고 웃으며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작가 인터뷰 - 이기쁨
Q. <대한민국 난투극>은 2015년에 초연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쓰게 된 건가? 실화라고 하던데?
A. 2014년 여름, 짧은 사회면 뉴스를 본 게 시작이었다. 고등학생이 강해 보이고 싶어 난투극을 벌였다는데, 그 상황을 상상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무슨 일이 있어 그런 일을 벌였을까, 또 5만원을 받고 조폭 노릇을 해준 그 청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상상하다 보니 너무 슬퍼졌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래서 그 기사를 소재로 잡아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겪었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누군가'들이 겪었던 소재들을 엮어 픽션으로 만든 것이니, 꽤나 리얼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Q.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얘 기해줄 수 있나?
A. 28살 마지막 때, 20살 때부터 하루도 제대로 안 쉬고 공부하고 일하다 보니 완전 번아웃 상태였던 것 같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주제에 모아 뒀던 돈을 싹싹 긁어 캐나다에 다녀왔다. 두 달간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책 보고, 글 쓰고, 산책하고, 맥주 마시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간 못한 거 다 하겠다는 그런 오기였던 거 같기도 하다. 해를 넘겨 귀국해서 극단 연습실까지 만들고 나니 수중에 정말 1원도 없었다. 당장에 버스 탈 돈도 없고, 끼니를 해결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출국 전에 해오던 아르바이트는 이미 사람이 구해졌고, 가방에다가 이력서를 수십 장씩 넣어서는 며칠 내내 덜덜 떨며 온 동네방네를 돌아다녔다. 낮에는 연습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해야 하니까 심야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여자라서 안 써주거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못 쓰겠다는 거다. 매일 매시간마다 퇴짜를 맞았다. 큰일 났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없는 주제에 욕심이 과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배도 고프고, 마음으론 이미 눈물이 한 바가지 흐르고 있는데, 눈앞에 손글씨로 삐뚤삐뚤하게 '알바 구함'이라고 쓰여진 종이가 붙어있는 거다. 간판을 보니 노래방이었다. 홀린 듯 그냥 들어갔다. 사장님이 날 한참을 보더니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네?" 하시더라. "여자, 남자 상관있나요. 뭐든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다. 사장님이 한참을 가만히 보시더니, 별다른 얘기는 묻지도 않고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거다. 대학 합격소식 들은 이후 가장 기뻤던 순간인 거 같다. 누군가가 내게 일을 시켜준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노래방인 줄 알았던 가게가 주점이라는 걸 그후에야 알았지만, 당장 돈이 너무 필요했으니 거절하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일을 시켜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너무 고마웠으니.
Q. 그럼 대한이가 겪은 일들을 본인이 진짜 다 겪었단 건가?
A. 얼추 그랬다고 보면 된다. 살아가면서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 니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였다.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고 싶었던 거 같은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셈이다.
Q. 자기가 겪은 일이라면 누구보다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배우들은 실화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던가?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나?
A. 초연 땐 연습하면서 그 부분이 제일 힘들었다. 말 그대로 난 촬영해둔 영화처럼 그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배우들은 궁금해했다. 실제 그 공간과 사람들이 어땠는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래서 그 기억들을 모조리 꺼내 공유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객관적인 시점이 없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무서워졌다. 이게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관객들이 이 이야기 안에 담겨있는 인물들의 좌절과 슬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너무 나만의 감정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봐 두려웠다. 초연을 올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야 이 이야기가 내게 온전하게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재연 때는 더욱더 거리를 두려고 했다. 배우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사실에 기반을 두지만, 결국 배우 스스로 인물을 만들어 내길 원할 테니까.
Q. 그렇다면, 민국이가 겪은 일은? 견자단 오타쿠도 본인이 겪은 일인가?
A. 음, 일단 난 무술의 ㅁ도 모른다. '고등학생 난투극'이라는 소재니까 장면에서 액션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민국의 입장에서는 그 마지막 난투극이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었을 것이고, 멋있지 않아도 누구보다 처절하게 그 난투를 해냈으면 좋겠단 상상을 했다. 거기서 부터 이야기를 구상을 하니, 본인이 동경하는 '무언가'가 그 순간을 만들어냈으면 했고, 그게 동경 하는 것이 '무술' 그리고 '견자단'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나는 매니아라고 할 만큼 어떤 하나에 깊숙하게 빠진 적은 없다. 오히려 다방면에 관심이 분산되어 있다. 하지만 꽂히면 끝장을 보는 타입이다. 운동 삼아 시작한 복싱으로 생활체육대회에 출전을 하고, 운동 삼아 시작한 수영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좋아하는 제주도와 좋아하는 자전거를 엮어 2박3일 제주도 자전거 일주하고 그런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 오로지 흥미 위주로. 그러다 보니 한가지 주제에 관심이 지속되고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좀 부러웠다. 그 행위 자체가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니까. 요즘은 스스로 '오타쿠'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1인가구의 수가 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 이 많아지는 것도 이유의 하나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민국에게 그런 모습을 담아내면 어떨까 싶었다.
Q. 그럼 '견자단'이라는 존재는 민국의 아바타라고 이해를 해도 되나?
A. 어느 순간은 민국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더 크게 보자면 대한과 민국의 이상향 같은 존재 랄까? 그들을 곁에서 인도해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상상 속의 견자단은 항상 승자이다. 대한 과 민국은 현실 속에서 승자인 적이 없다. 매순간 실패다. 이 이야기의 엔딩도 그렇다. 결국 이들 이 기획한 난투극은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하는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벗어나기 위 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민국과 이 노력할 힘마저 없어지고 있는 대한에게 남은 하나의 희망이 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Q. 마지막 질문이다. 그럼 본인은 대한과 민국의 선택 중 어느 선택을 지지하고 싶은가?
A. 난 실제로 대한과 같은 선택을 했었다. 대학 졸업 후, 생계를 위해 회사에 취직했었다. 하지만 공연을 너무 하고 싶어서 어머니께 사죄하고 회사를 관뒀다. 그리고 계속 연극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 만든 극단이 벌써 10년째다. 이기적인 선택이지만, 오롯이 날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매일매일이 두렵다. 이것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지 매순간 걱정된다. 민국이 대한에게 하는 얘기가 결국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픈 얘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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