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씨, 절대로 똑바로 서려고 노력하지 말고 편안하게 자빠지는 거예요. 뒤통수가 여기에 콱 찍히게. 알겠죠?"
70대 치매 아버지 '고태'를 모시고 살아가는 40대 '무영' 그녀는 고태가 운영하던 허름한 목욕탕을 물려받아 운영 중이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무영은 고태를 데리고 영업이 끝난 목욕탕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고태를 죽이기로 한다. 고태를 죽이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무영의 행동은 어설프기만 하다. 그리고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온 고태를 마주하게 되는데...
살인이 처음이라 어설픈 `무영´과 치매를 앓으며 고집불통 아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고태´의 대립은 `살인´이라는 소재를 '상황'이라는 공포와 코미디가 상존하고 있다.
연극 〈나는 오늘 그 사람을 죽인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소, 한 시간대에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연극으로 단막극의 기본에 충실한 연극이다. 유쾌하게 보여지는 둘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영'과 '고래'의 내면에 집중한다. 잔혹했던 과거에서 어떻게 든 벗어나려 '살인'까지 계획한 '무영'의 노력은 웃음에서 연민으로 변화한다. 마치 상처를 안고 꿋꿋이 웃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가장 행복한 순간도 가족에게서 비롯되지만, 도저히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은 상처도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은 딸의 이야기다.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도, 누군가로부터 치유 받지도 못한 채, 마음에서 곪고 곪아 터져버리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지만, 그 상처를 온전히 마주할 용기가 없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복수"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굴레를 만들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무대는 동네 허름한 목욕탕이다. 타일의 형태로 된 욕탕이 보이고 좌측으로 출입문과 그 앞으로는 좌식 샤워기들이 보인다. 시간은 설 연휴가 시작되는 전날 저녁쯤 일어나는 일들이다. 바닥에는 일회용 샴푸와 타올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락스 통과 대형 바닥 솔도 보인다. 전화통과 맥주와 마른안주를 무영이 들고 들어 오면서 이어, 맥주와 땅콩, 오징어는 고태를 죽인 뒤 시원하게 마실 거라는 무영의 대사와 이불보에 싸서 목욕탕 내부로 고태를 끌고 들어온다. "고태씨, 어디서 뭐 훔쳐 먹었어? 다른 집 노인들은 죽을 때 되면 뼈만 앙상하다던데 어째 고태 씨는 더 찌는 것 같아?" 살인자의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악마의 소리가 아니라 투덜대는 인간의 소리로 느껴지면서 두 사람의 과거 삶을 듣게 된다. 무영은 고태를 죽인 후 치매 환자가 욕탕 물에 혼자 빠져 죽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전화통을 들고 어설픈 예행연습을 하고 고태를 향해 "들었죠. 고태씨? 나 이렇게 할 거예요. 나 잘하지. 그리고 저 맥주를 콸콸콸 먹을 거야." 의식이 돌아와 이불을 빨라는 고태의 위압적인 말에 두 발로 이불을 꾹꾹 밟아가며 묵은 때를 벗겨내면서도 꼬장꼬장한 고태가 물을 아껴 쓰라며 이년, 저년 하며 "집에서 밥하고 빨래만 하는 년이 뭐가 힘들다고 징징거려"라는 말에는 두 사람의 대화와 삶이 불편해진다. 이불보에 쌓여 형체를 볼 수 없었던 고태가 깨어나면서부터 극은 반전된다. 기저귀를 갈아주며 무영의 살인 설명서가 행동으로 옮겨지고 관객은 목욕탕 바닥에 똥오줌을 지리는 고태를 보면서 무영의 살인은 싱겁게 끝나겠다는 것을 상상하게 되는데, 무영의 살인 방식에 집중하게 될 때쯤 전화벨이 울리고 정상인 의식(意識)으로 돌아와 할 말 못 할 말 쏟아내는 고태의 설정으로 오늘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살인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무영은 고태를 뜨거운 온수가 넘치는 탕 속으로 밀어 넣고 목을 조르는 순간 설 연휴에도 목욕탕을 영업하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 오고 고태는 수화기를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식이다. 두 번째 살인 방식은 미끄러운 목욕탕 바닥에서 스스로 죽기다. 무영은 목욕탕 바닥에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비누로 미끌미끌하게 칠하고 고태를 바닥 위로 일으켜 세운다. "미끌미끌한 느낌이 들 때, 그때 자빠지세요."하는데도 멀쩡하게 타일 바닥을 걷는 고태 사이를 왕복하며 마치 컬링선수처럼 밀대 바닥 솔로 자연스럽게 넘어지질 수 있도록 하나, 둘, 하나, 둘을 외치며 죽음을 유도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면서 극은 여전히' 그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오늘'이 된다. 무영의 어설픈 살인 계획은 웃음을 장전하면서도 두 사람과 실종(죽음)된 엄마의 과거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누군가의 자전적 이야기처럼 화해와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고태는 죽은 아내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폭력으로 대하던 과거를 기억하는 무영은 엄마의 혼령이 무의식으로 투영되어 죽은 엄마의 내면의 삶으로 동일화된다. 폭력은 고태의 과거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억압적인 가정환경과 폭력을 받아온 사실을 고백하면서 고태도, 딸 무영이도, 죽은 엄마도 락스로 목욕탕 바닥을 닦아내도 지워낼 수 없는 상처로 할퀴어져 있는 불안전한 내면들로 엉켜있다. 치매에 걸려도 지워 낼 수 없는 과거 시간과 벗어날 수 없는 고태의 내면은 거세된 모성의 결핍으로 분노와 복수로 쌓여 고스란히 딸과 아내로 대물림된 사실이 밝혀질 때쯤 극은 목욕탕 온수의 열기만큼 정점을 향하게 된다. 목욕탕 바닥을 평생 문지르며 락스로 지문이 닳아버리고 고태의 폭력으로 사라진 아내의 이빨처럼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으면서도 딸 때문에 견디며 살아야 했던 아내는 죽어서도 죽음의 순간을 막아 두 사람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처럼 물속으로 고태를 집어넣고 숨통을 짓누르는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마치 허름한 목욕탕을 지켜낸 엄마의 혼이 목욕탕을 배회하는 것처럼 수화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피멍에 박혀 있는 송곳을 빼기 위해 가족들을 향해 마지막 치유를 시도한다. 고태가 스스로 머리를 목욕탕 벽면으로 처박고 숨통을 끊으려고 할 때쯤 무영은 말리고 고태 입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희미하게 터져 나온다. 그리곤 이 복수의 행위는 내년 설까지 보류된다.
작가의 글 - 여온
세상의 모든 '무영'을 위로하며,
70대 치매 아버지 '고태'를 모시고 살아가는 40대 '무영', 그녀는 고태가 운영하던 허름한 목욕탕을 물려받아 운영 중이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 고태를 목욕탕에서 죽이기로 한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과 친족 살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희곡은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영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의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살인'이라는 발버둥을 쳐보지만, 발길질이 거세질수록 자기 몸뚱이는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다. 가장 행복한 순간도 가족에게서 비롯되지만, 도저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깊은 상처도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상처를 짊어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무영'을 꼭 안고 말해주고 싶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만 아파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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