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수미 '달의 목소리'

clint 2023. 3. 21. 17:12

 

난 내 얘기를 남기고 싶지 않다. 자랑 거리도 아니고 자랑 하자고 한 일도 아니다.

나 아닌 누구였어도 다들 했을 것이다.”

 

작품은 배우가 왜 故정정화 선생의 이야기로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정정화라는 인물이 걸었던 시대를 시간을 쫓아가면서 독립이라는 역사적 명분아래 인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치와 의미, 그에 따르는 두려움과 감동, 시대의 정의에 대해 묻는다. 정정화 여사가 처음 상해로 건너갔을 때부터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본국을 드나들었던 기록과 세계정세에 흔들렸던 독립의 위기와 독립이후 국내 사정, 그리고 전쟁,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한 여인이 차디찬 철창 안에서 자신의 삶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던 신념을 빼앗겼던 기록까지...배우는 그녀를 세웠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들여다보는 동시에 우리가 지금 무엇으로 나를 세우고 있는지 묻는데...

 

 

<달의 목소리>는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를 근간으로 삼은 1인극이다. 정정화가 회고록을 쓴 이유는 명백하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 장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러한 목적은 <달의 목소리>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부터 시작된 정정화의 항일투쟁기는 그 자체로 극적인데, 희곡은 그 맥락을 따라가되 절대로 특정인물의 영웅 만들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기록에서 제외된 역사,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을 고스란히 펼쳐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장강일기』 자체가 항일투쟁기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기록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정정화와 상해 임시정부, 그리고 해방 이후의 조국을 펼쳐내고 있다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 명이지만 실제로는 둘이다. '' '정정화 『장강일기에 서술된 내용이 중심일 때는 '정정화' 스스로 발화하는 형식이고, 정정화의 행적과 다른 장면들을 구체화할 때는 ''가 정정화를 '그녀'로 지칭하면서 객관화한다. '' '정정화'를 오가는 화자의 태도변화는 다양한 효과를 창출하는데, '정정화'일 때는 적극적 감정이입을 꾀하고, ''일 때는 객관적 상황을 판단하게 한다. 이를 통해 조국을 잃은 망명자의 삶, 투쟁하는 투사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임시정부 살림을 책임진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도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결국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역사를 관통하게 되는데, 이는 곧 '개인이 역사'라는 것을 연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의 목소리> 1인극임에도 긴 시간을 압축해서 시공간의 이동이 잦은 편이기 때문에 긴장과 이완, 집중의 맥락이 생겨났다. 희곡이 한 호흡에 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회고록을 모티프로 삼아 1인극이라는 형식을 선택했지만 인물을 이원화했고, 장면에 따라 다른 화자를 활용하여 장면의 의미를 강조하는 극작술을 선보였다. <달의 목소리>는 소재적인 측면에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했다. 1인극, 회고록, 항일투쟁기 등등이 마치 역사교과서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나열하고 설명하는 식으로 치우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마주한 김수미 작가는 영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독자들/관객들에게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이해와 공감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화자를 둘로 나누었으며, 화자가 건네는 대사들이 긴장과 이완의 극적 리듬을 만들어내도록 한 것이다. 이 덕분에 <달의 목소리>는 비록 한 명이 들려주는 이야기이지만 과거의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아낸 인물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었고, 소리 내지 못했던 존재들이 목소리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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