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조금 특별한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보통 '관계'라고 한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상상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인간과 집, 즉 인간과 공간에 대한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 집주인이 되어버리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집이 있다. 집을 사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어딘가 안락하고 평안한 집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게 만들고 철저하게 인간을 고립시킨다. 거주자는 집의 그 의도를 모른 채 편안한 삶에 만족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집이 움직인다는 것, 자신에게 최적의 상태로 맞춰준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집을 벗어나고자 한다. 새로 집을 사는 사람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먼저 살던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집이 움직인다는 발상은 매우 흥미롭다. 그 공간에 들어올 사람을 본인이 선택하는 듯한 집은 일단 새로운 주인이 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 불편함이 없도록 적당한 온도에 습도를 제공하고 때맞춰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키며 햇빛도 기분 좋게 조절할 줄 안다. 평온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제공하는데, 사람들은 결국은 벗어나려고 한다. 안락한 집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을 집이 죽이는 것은 배신에 대한 응징으로 보인다. 이 기묘한 집과 사람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집이 의인화되고 성격을 부여 받게 된 것은 일방향적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로 해석된다. 아낌없이 다 주는 집, 쾌적함과 안락함이란 공간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선사하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은 결국은 그 집을 떠나려 한다. 일방향적 애정과 관심에 대한 부담, 주체로서의 자존감상실, 수동적으로 변하는 일상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이 주는 안락함은 인간을 고립시켰고 그 고립된 인간을 품은 집 또한 고립된 공간이다. 집이 이토록 사람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야 비로소 집이라는 공간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집 없이 살 수 있지만 집은 사람 없이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니 필수불가결한 사람과 집의 관계가 조금 더 절실한 집의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집>이 흥미로운 것은 '관계'에 주목했을 때, 집이 보여주는 집착이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식에게 제공해주면서 자신의 바람대로 성장해 주길 강요하는 부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연인, 이런 양상이 <집>의 집과 사람 관계로 고스란히 은유 되고 있다. 작가는 집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 어떤 관계든 일방향적인 관계는 문제가 있음을 움직이는 집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집에 사는 남자가 왜 반찬 없는 즉석밥을 먹는지, 왜 푸석하게 늙어버렸는지, 왜 그렇게 애써서 집을 팔려고 하는지, 첫 장면에서 생긴 질문은 살려는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친절히 설명되어 있다. 김수미 작가의 희곡 중에서 비교적 친절하게 상황과 인물심리가 잘 드러난 작품인데, 여기에는 집을 의인화한 설정도 한몫을 했고, 그것을 표현한 지시문의 역할도 컸다. 실제 무대화 되었을 때 움직이는 집을 연출가나 무대 디자이너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매우 궁금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싶긴 한데, 읽는 희곡으로서는 집이 하나의 인물처럼 형상화되어 있고, 특정한 인물로서의 행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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