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피자 가게를 하며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게 살다가 바람난 부인과 이혼하며 위자료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큰아들. 막노동도 잡기 어려운 요즘엔 로또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주식으로 돈 벌어오는 아내에게 쩔쩔매며 사는 작은 아들은 오토바이 배달을 하지만 아내에게 가장의 위엄을 찾기엔 역부족이다. 승무원인 셋째는 비행기에서 만난 브라질계 한인 남자를 데리고 집에 와 생활비를 대고 있지만 이내 해외 발령으로 떠나야 한다. 이렇듯 자식들은 따로 또 같이, 다른 듯 또 같게 살아간다. 벽 너머에서 콩콩콩 소리가 난다고 힘들어하는 엄마.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를 자신들은 부정하지만 닮아 있다. 그 자식들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를 혼자 둔다. 그런 이들에게 삼촌이 아버지 '이장(移葬)' 소식을 갖고 찾아온다. 자꾸만 꿈을 꾼다는 엄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 꿈일까?
박근형의 작품 '이장(移葬)'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또 자식인 우리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처럼 되기 싫은 가족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장’에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싫지만, 결국에는 아버지 모습을 닮아가는 자식들. 자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어느새 보살핌이 필요한 노인이 된 어머니. 연극은 이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장’은 아버지의 산소에 물이 차서 이장해야 한다는 삼촌의 얘기를 듣고서 흩어져 살던 가족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독립해서 잘 살아야 할 나이지만, 여전히 본인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3남매와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어머니 집에 얹혀사는 큰아들은 피자가게를 운영했으나 주방장과 바람난 부인과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가게와 아파트, 차까지 몽땅 날렸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작은아들은 생계를 맡고 있는 아내에게 늘 기가 죽어지낸다. 늙은 어머니는 밤마다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면서 앓고 있다. 젊은 시절, 자기 멋대로 살다 간 남편 때문에 녹록지 않았던 그녀의 삶은 그 이후로도 나아진 게 없다. 북에 두고 온 고향, 부모, 전쟁 한복판에서 죽은 오빠들, 그리고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기억들이 그녀의 작고 구부러진 몸안에 배어있다. 죽어가는 몸, 그 몸에 담긴 기억들. 그러나 자기 하나조차 제대로 버틸 수 없는 두 아들은 어머니의 아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큰아들이 안쓰러운 어머니는 외국인 사위를 졸라 몇 푼의 돈을 빌려 큰아들에게 쥐어준다. 큰아들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못내 자존심이 상하고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도 없다. 어머니에게 돈을 받은 그가 달려가는 곳은 로또 가게다. 일확천금밖엔 그의 삶에 답이 없다. 어머니 역시 그것을 알기에 큰아들에게 돈을 쥐어 줄 때마다 힘껏 응원한다. 그 간절함이 덩달아 자기가 로또에 당첨되는 꿈으로 이어진다. 큰아들의 빈 가방에는 그가 언젠가 일용직 노동할 때 썼던 망치가 들어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꺼내 쓸 수 있겠지만, 노동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막내딸이다. 하지만 막내딸은 가족으로서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도리만 한다. 이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거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녀가 많은 직업 중 항공기 승무원을 직업으로 택한 것도 가족 때문이다. 아버지가 남긴 답 없는 삶 속에 빠져 아버지와 또 다른 의미에서 무능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빠들의 나라에서 죽어도 살기 싫은 것이다. 아버지가 너무 싫어, 오빠들이 너무 싫어, 아니 이 땅의 남자들이 너무 싫어 남편도 브라질계 한인을 택한 것이다.
작은 아버지는 문득문득 찾아와 죽은 그들의 아버지를 ‘이장’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보면 아버지가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포천에 묻혔다고 하고, 나중에는 용인에 묻혔다고 하는 등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기억도 점차 증발되어버립니다. 작은 아버지는 번번이 이장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이장의 이유도 그때그때 다르다. 묘지에 물이 차서라고 했다가 공공택지로 지정되어 라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자식인 그들이 죽은 아버지를 이장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작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 그냥 믿고 맡기기로 한다. 그런데 왠지 작은 아버지에게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부동산업을 해서 돈은 있어 보이지만 가난한 형수는 물론이고 조카들에게 인색하기 짝이 없다. 편의점 커피를 좋아하는 것이 취향이라니... 형수에게 건네는 건 바나나 우유가 전부다. 이장 문제로 얘기할 게 있다며 조카들을 불러낼 때도 카페가 아닌 길거리에서 만나자고 한다. 조카들에게 건네는 캔커피도 아들을 시켜 편의점에서 사온 것이다. 이제 큰아들은 어머니의 한숨 섞인 푸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동안 자기가 들었던 소리가 알고 보니 옆집에서 죽어가는 한 청년이 살려달라고 내지르는 비명이었다며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큰아들은 무시한다. 자기 역시 그 못지않게 죽을 지경이니까. 순간, 그는 가방에 넣어두었던 망치를 꺼내 사방의 벽을 부서져라 두드립니다. 살려 달라고, 나도 살려 달라고, 아니 살게 해 달라고... 그의 불안과 절망이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돌발행동에 혼란스럽다. 가슴이 아프고 슬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했건, 미워했건 자기 삶을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들과 함께 모여 고기도 굽고 전도 부쳐 나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며 한을 푸는 것이 소원이라며 아련한 감정에 빠진다. 큰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자식으로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만 문제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픈 것이다.
어머니는 낡은 침대에 웅크린 채 잠자듯 세상을 떠난다. 끝까지 고된 그녀의 삶도 애잔하지만, 문득 우리의 삶이 오버랩 되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검은 상복을 입고 죽은 어머니의 옆에 선 가족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 '이사' (단막극) (1) | 2023.02.21 |
---|---|
황정은 '운전하기 좋은 날'(단막극) (2) | 2023.02.21 |
김진욱 '월드다방' (2) | 2023.02.18 |
서종현 '인어, 그때 왜 바다가 푸르지 않고 검었었는지' (1) | 2023.02.16 |
구도윤 '너를 만난다' (1) | 202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