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입센 작 김미혜 역 '페르 귄트'

clint 2023. 1. 6. 16:46

 

입센의 작품 중 ‘가장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구사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 <페르귄트>는 근대 사실주의의 대가 헨릭 입센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흥미로운 모험이 마치 한 편의 판타지 영화처럼 펼쳐지는 대서사이다. 자신의 모국인 노르웨이의 민속설화를 모티브로 방랑하는 시인이자 허풍쟁이 주인공 페르 귄트를 탄생시킨 입센은 페르 귄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과 함께 종교적 성찰을 깊이 있게 녹여내고 있다. 특히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와 “조곡”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이 작품은 허풍쟁이 페르 귄트가 노르웨이, 이집트, 터키, 모로코 등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면서 겪는 신비한 경험들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펼쳐낸다. 또한 페르 귄트가 만나는 트롤, 초록여인, 원숭이, 단추공 등의 환상적인 캐릭터들은 현실과 판타지가 교차하는 그의 모험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풀어 놓는다. 시대적 배경은 18세기 초부터 이 드라마가 씌어진 1860년대에 이르는 반세기였고, 공간적 배경은 작가의 고국인 노르웨이의 산악 지대에서부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집트까지, 너무 광대하여 연극 무대에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도 100여명에 달했고, 그 중에서는 트롤 같은 요정에서부터 미치광이, 사기꾼, 선장, 유목민 베두인족 등 여러 대륙에 걸쳐 흥미 있는 존재와 전설적인 비현실적 존재까지 나온다. 

 

 

제1막
페르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탕진한 뒤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오세와 단둘이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는 ‘세계의 제왕’이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갖은 허세를 부리지만, 일은 게을리 하고 늘 빈둥거리죠. 어느날 마을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을 지나다가 충동적으로 신부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제2막
페르는 자기가 신랑인 양, 납치한 남의 신부와 첫날밤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혼식장에서 잠시 마주친 ‘솔베이지’를 생각한다. 다음날 아침, 신부를 외면하고 더 깊은 산 속으로 가버리고... 산속에서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산속 트롤왕의 딸이었다. 마왕은 자기 딸과 결혼하라고 하지만 페르는 거절하고 치도곤을 당하죠. 겨우 빠져나와서 깊은 산 중에 막을 치고 살아간다.    

 


제3막
산 속에서 혼자 지내는 페르에게 솔베이지가 찾아와서 얼마 동안 같이 살게 된다. 왕의 딸은 솔베이지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그럼에도 페르는 솔베이지를 혼자 남겨두고 어머니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페르는 이번엔 꿈을찾아 바다로 방랑을 떠난다.
 제4막
페르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기꾼에게 모두 잃고. 아라비아에서는 예언자가 되어서 다시 큰 재산을 모으고, 추장의 딸 아니트라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하지만 아니트라는 페르의 돈을 모두 훔쳐서 돌아가 버리고. 페르는 다시 이집트를 향해 떠나가면서 방랑을 멈추지 않는다.
제5막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발견해 엄청난 부자가 되어, 드디어 고향으로 향하지만 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서 다시 거지가 된다.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노인이 된 페르는 산속에 있는 오두막에 오니 백발의 노파가 된 ‘솔베이지’가 페르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는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그녀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 듯이 숨을 거둔다.

(이 번역본에서는 솔베이지가 노르웨이 발음대로 술바이로 표현됨)

 

 

이탈리아의 풍광과 예술품의 크기에 대한 깨달음, 노르웨이의 실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 고국에서 겪었던 과거와의 결별로 <브란>의 대성공 이후 단 1년 만에 또 한 편의 대작인 5막극 <페르 귄트>를 발표했다. 대작임에도 <페르 귄트>가 이른 시간에 장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작품상 십여 년 전부터 작가의 내면에서 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차적으로 공연의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라는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방대하고 자유로운 ''로 쓸 수 있었다. <페르 귄트>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매우 자유로워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교차하며 꿈과 상상, 판타지 속의 인물들까지 등장하고, 극적 장소들도 아무런 제약 없이 이동한다. 이는 입센 자신이 영국의 입센주의자 에드먼드 고스에게 1872년 보낸 편지에서 <페르 귄트> <브란> '반명제'이며 '거칠고, 무형식으로 산만하게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쓰였다,"고 밝히면서 특히 이렇게 쓸 수 있는 것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증명하고 있다.

 입센이 이 5막의 극에서 의도했던 것은 노르웨이인들의 실체, 즉 ‘이기심, 편협함,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한 것이다. <페르 귄트> 발표 직후의 한 리뷰에서 뵤른손도 <페르 귄트>가 장대한 시적 성취물이자 노르웨이인들의 실체를 폭로한 풍자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작품을 노르웨이인들에게 선사한 작가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노르웨이인들의 실제를 폭로하고 풍자하기 위해 입센이 <페르 귄트>의 소재를 노르웨이 전설에서 취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매우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사냥과 모험을 즐겼다는 실존인물인 사냥꾼 페르 귄트가 직접적 모델인데 이 실존인물 페르가 사냥 중에 무서운 적 뵈이그와 만났다고 전해지는 전설이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가 펼치는 모험과 편력의 중요한 뼈대가 되기 때문이다.

<페르 귄트>는 작가 입센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는 노르웨이의 '영웅적 과거와의 최종적 결별'이다. 이후 입은 노르웨이의 과거를 소재로 하는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았으며 로마 역사를 소재로 한 <황제와 갈릴리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당대를 소재로 하며 사회문제극의 작가가 된다. 그 둘째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어느 작품보다도 입센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명문가로 흥청이며 살다가 몰락한 페르 귄트의 가정은 다름 아닌 입센 자신의 가족사를 반영한 것으로 입센 자신이 <페르 귄트>를 쓰면서 부유한 욘 귄트 가정의 생활을 묘사할 때 자기 자신 유년기의 상황과 기억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았다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다. 또한 아들 페르에게 깊은 영향을 주며, 페르로 하여금 그녀가 죽은 후에도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에게 종속되어있는 퇴행적 모습을 보이게 하는 어머니 오세는 약간 과장된 모습이긴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마리헨(Marichen Altenburg)이 모델이라고 입센 자신이 브라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기도 했다.

 페르의 편력과 모험은 궁극적으로 페르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그러나 페르는 경험과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없으며 인간관계도 제대로 맺지 못한다. 5막에 나오는 '양파 모티프'에서 알 수 있듯 페르는 알맹이 없는 허풍쟁이, 바람둥이, 몽상가, 위선자이다. 페르와 노르웨이인들을 등치하자면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노르웨이인들이 당황해하며 놀랐던 것은 당연하리라. 이미 언급했지만 뵤른손은 입센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너무 불유쾌하고, 너무 불분명하고, 너무 억지스럽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페르 귄트> <브란>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품임은 인정했다. 이 평가는 페르를 보편자로 볼 때라는 전제가 붙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수긍하면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인인 한 남자가 자아를 찾기 위해 편력하는 이야기 이상의 것이다. 그의 인간적 약점들은 바로 보통 인간들의 약점들이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는 것은 페르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들 대개가 그렇지 않은가? 책임 회피, 허세와 위선,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는 인간성에 대한 경멸, 자기 증오 등 추하고 왜곡된 삶의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지 않은가?

 덴마크에서도 평가는 다르지 않았다. 당대 덴마크 최고의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이 <브란> 보다 더 많은 위트와 진정한 자유 정신을 읽게 하며 작가의 재능이 낳은 자연스런 작품임은 인정했으나 모든 시의 근본이 되는 '이상적인 것'이 결핍되어 있어 논쟁적인 저널리즘적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브라네스 역시 고국의 동포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정밀과 증오가 문학 작품의 근거로선 약하고, 삶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아름답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부정적 평가들에 대해 입센은 매우 자의식에 차 자신을 미학적 규범의 혁명가, 극예술의 혁신자라 자평했다. 그는 <페르 귄트> ''이며 미래에는 시의 개념이 자신의 작품을 규준으로 삼을 것이라 확인했다.

 입센의 창작 의도가 무엇이었든 <페르 귄트>는 오늘날 북유럽의 <파우스트>로 평가된다. 우선, 막과 장면의 구분은 있지만 두 작품이 형식에서 자유롭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주인공들인 파우스트 박사와 페르 귄트는 분명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닌 인물들이다. 전자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편력한다면 페르 귄트의 편력은 양파까기와 비견되는 알맹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도 자신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귄트적 생'의 진실을 깨닫기는 한다. 또한 두 인물 모두 구원의 여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파우스트에겐 그레트헨이, 페르 귄트에겐 슐바이가 있는 것이다.

<페르 귄트>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솔베이지'라고 불리는 구원의 여인상과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솔베이지 모음곡'에 들어있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알고 있을 것이다. 페르가 제1막에서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하는 슐바이의 모습은 작품 내내 페르의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여인상으로 존재하며, 부친의 파산으로 '어둠의 자식'이 되어버린 페르를 ''으로, 종교성으로 비춘다. 입센이 페르 귄트는 전설 속 모델을 근간으로 창조한 건 분명하지만 슐바이는 이름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곧 알 수 있도록 창조했다. 어원적으로 '(sol)'은 태양을, 바이(vei)는 길을, 또한 '바이(veig)'는 고대 노르웨이어에서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슐바이는 모든 이들에게서 백안시되는 페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녀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 오랜 세월 방황했던 페르이지만 그는 바로 그녀의 "믿음", 그녀의 "희망", 그녀의 "사랑"에 존재했다. 슐바이는 입센이 창조한 어떤 여인보다 아름답고 순수하여 살아있는 인물이기보다 페르의 내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순수를 희구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평자들로부터 결코 우호적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1867 11월 출판된 <페르귄트>는 판매가 잘 되어 2주 후 2,000부를 더 찍었다. 세계초연은 희곡이 출판된 지 거의 10년이 지나 1876년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이루어 졌다. 이 대작의 연출자는 당시 이 극장의 극장장이었던 스웨덴 출신의 요셉손(Lucdvig Jonepson)이었다. 그는 이 대작에 내재된 연극적 가능성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스웨덴 출신이었지만 그는 극장장으로 임명되자 입센 작품들의 무대화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873/74 시즌을 <왕위 주장자들>로 오픈했고, 같은 시즌에 <사랑의 희극>도 무대화했다. 후자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자 요셉손은 레제드라마로 쓰인 <페르 귄트>를 무대화 하여 세계 초연한 것이다. 많은 삭제에도 4시간 45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의 맘모스 공연이었던 요셉손의 <페르 귄트>는 당시까지 노르웨이에서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공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공연에는 그리그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음악을 썼고, 요셉손의 미장센에서는 궁극적으로 '로컬 컬러와 '진짜' [노르웨이의] 민족적 디테일이 풍부했고", 풍자적 요소보다는 서정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사실 <페르 귄트>를 내재적 낭만성의 측면에 중점을 두어 본다면 작품의 크기가 작아진다. 그럼에도 20세기 이전 <페르 귄트>의 무대화는 대개 낭만적 작품으로 창조되었고, 페르의 편력이 행해지는 노르웨이의 풍광에 중점이 주어지곤 했다. 여기에는 물론 세계 초연을 위해 작곡된 그리그의 음악이 지닌 낭만성도 한몫을 했다. 191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연출로 무대화된 <페르 귄트> 역시 이 19세기 무대화의 콘셉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양식화된 무대 세트들과 상징적 무대효과를 추구했지만 역시 그의 본령인 사실주의적 연출기법은 고수했다. 상징주의 화가인 레리츠(Nikolai Rerich)의 무대세트 중에서 특히 옌딘 산맥의 환상적인 형상과 페르와 슐바이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의 우거진 숲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그의 원 음악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19세기의 무대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페르귄트> '반 낭만적 작품으로 무대화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1933년 메틀링(Svend Methling) "페르 귄트의 여행은 노르웨이를 관통하는 여행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관통하는 여행"이라 해석하며 코펜하겐의 왕립극장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 1948년 오슬로의 노르웨이 극장에서 타이틀 롤과 연출을 맡았던 닐센(Hans Jacob Nilsen)은 더욱 대담하게,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을지 모르는 '트롤'을 의식하게 하고, 그 트롤과 싸울 준비를 하게끔 충격을 주는 무대를 만들었다. 음악의 경우도, 그리그의 낭만적이고 민족적인 음악은 <페르 귄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며 세베루드(Harald Severud)의 강렬하고 부조화스러운 음악을 사용했다. 특히 발렌틴(Arme Walentin)이 디자인한 주된 회전무대는 극이 진행되며 회전할 때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발렌틴은 공간과 빛, 색깔과 형태들을 다양하게 조직함으로써 꿈과 판타지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페르의 자아 탐구 여행이 풍요로운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만화경처럼 형상화되었다. 닐센의 미장센은 찬반의 논란을 낳았지만 이후 <페르 귄트〉를 보다 다양하게,  '다르게', '새롭게' 읽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7년 스웨덴의 말뫼(Malmö) 시립극장에서 무대화된, 출연진 90명의 맘모스 공연 <페르 귄트>의 연출자는 잉그마르 베리만이었다. 그의 연출은 그동안 어느 정도 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의 스펙터클한 만화경으로 보여주었던 <페르 귄트> 무대화의 관습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베리만은 이 작품의 서브 텍스트에서 어떤 낭만성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센티멘털한 스테레오 타입화와 이상화를 벗겨 버렸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기회주의적이고 의심에 쌓여있는 페르의 내적, 영적 여행은 결국 환상에서 깨어나는 무() 라는 것이 베리만의 지배적 콘셉트였기 때문이다. 베리만의 <페르 귄트>에는 음악도 거의 없어 슐바이는 노르웨이의 단순한 민요 멜로디에 맞춰 노래했고, 아니트라는 단 하나의 드럼 소리를 반주로 거칠고 섹시한 춤을 추었다. 그의 연출은 궁극적으로 비 물질화되고 반 낭만적이며 실존주의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페르라는 한 인간의 개인적 고통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러나 1971 <페르 귄트>로 베를린 샤우뷔네(Schaubihne)를 오픈한 페터 슈타인은 페르의 여정을 부패한, 부패하고 있는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의 반영으로 해석함으로써 베리만의 개인적 측면이 아니라 페르가 관계 맺는 사회에 대한 관점으로 제시되었다. 슈타인은 페르를 쁘띠-부르주아 모험가의 원형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슈타인은 <페르 귄트>를 시대착오적 작품,  19세기에 생산되어 박물관에 박제된 채 전시되어있는 작품으로 보았고 이를 현대에 '인용'하는 서사극적 기법으로 연출했다. 슈타인과 그의 앙상블은 <페르귄트> 속에 들어있는 동화적 요소들을 관객에게 마치 그림책을 펼쳐 보이듯 제시했다. 이틀에 걸쳐 제시된 이 공연은 하루에 1부씩, 모두 2부에 8개 장면으로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에 의해 재배열되었으며 공연장은 야외에 있는 대규모 전시장인 노천의 공간이었다. 장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자의 목소리로 확성기를 통해 마치 페르의 삶을 담은 이야기책 속 여러 제목처럼- 페르 역의 배우들의 이름과 함께 제공되었다. 이틀째의 공연에는 "외국에서와 고향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고 첫날 공연된 내용의 시놉시스가 다시 주어졌고, 첫날 공연에서 페르 역을 맡았던 네 명의 배우들은- 둘째 날엔 두 명 추가 중요한 순간들을 재연했다. 슈타인은 '양파-모티프'에 부르주아지의 기본적 태도,  "정체성 추구, 끊임없는 자기 거세,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갈망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양파를 까며 자아를 깨달은 후 페르가 만나는 '단추공'은 스스로를 '엔지니어 단추공'으로 소개한다. 미래의 기술자인 그의 임무는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 즉 무의미한 개인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인들, 독립된 자산가 등 퇴보하는 중산층을 모두 끌어모아 재활용하는 것이다. 페르 역시 경제가 잘 돌게 하기 위한 윤활유가 되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가 새로운 원료로 재생산되어야하는 것이다. 페르와 슐바이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노동자들이 두 남녀를 주요 연기공간으로 데려와 다른 전시물들 한가운데에 마치 피에타상처럼 놓았다. 이는 무대 위의 모든 대·소도구들과 오브제들이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 관객들은 자신들이 속한 쁘띠 부르주아지가 달성했다고 상상하는 최상의 것에 대한 냉소적 코멘트를 마치 다른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일어나는 일인 양 거리를 두고, 그야말로 서사적으로 관극할 수 있었다. 주인공 페르의 역할도 6명의 배우에게 분배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연기하면서 코멘트하게 하는 슈타인의 <페르 귄트>를 관객들은 “페르와 그의 부르주아 세기의 이야기", "사진첩에 들어있는 키치한 사진"으로,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비판적 역사"로 보았다.

21세기 초, <페르 귄트>는 그로테스크 미학의 측면으로 다르게 읽히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브뤼닐스폴(Knut Brynhildsvroll)로 오슬로 대학부설 입센연구소 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주장의 단초는 <페르 귄트>의 연구사에서 미학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너무 윤리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페르 귄트를 "자신이 되라"는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규범적 인물로 보는 실수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에 있다. 브뤼닐스푼은 <페르 귄트>를 한 마디로 '상실의 경험에 대한 시'라고 정의한다. 부유했던 아버지 욘 귄트의 파산 탓에 페르는 떠도는 젊은이로 원래 그가 속했던 사회와 그 사회의 가치관에서도 제외된 아웃 사이더가 되었다. 페르는 그런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결국 꿈과 환상, 공상 등이 옛 삶의 대치물로서 자신의 공허함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을 페르는 성장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페르는 거짓말쟁이, 몽상가, 환상가로서 세상에 대해 '창조적' 경험을 만들어 간다. 그가 처해있는 현실과 그가 '창조해 내는' 환상과 공상 속의 현실 사이에는 당연히 불일치와 부조화가 존재하며 이것이 <페르 귄트>에 내재된 중요한 미학적 측면이라는 것이 브뤼닐스의 관점이다. 부조화와 불일치가 그로테스크 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관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문예에서 그로테스크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며 무엇보다 기괴함과 혼합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그로테스크가 문예의 한 양식으로 자리매김된 때는 독일 문학사가 카이저 (Wolfgang Kayser)의 저서 『그로테스크』Das Groteske가 발표된 1957년 이후이다. 카이저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특히 낭만주의와 초기 모더니즘의 문학, 회화, 그래픽 예술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측면을 추적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를 창조와 수용미학 측면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미학적 층위에서도 추적할 수 있다고 논증함으로써 카이저는 그로테스크가 미학의 범주에 속하고, 또한 논의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한 사람, 톰슨(Philip Thomson)은 그의 책 『그로테스크』The Grotesque(1972)에서 그로테스크와 관련된 용어 및 양식으로 부조리한 것, 기묘한 것, 섬뜩한 것, 희화(캐리커쳐), 패러디, 풍자, 아니러니, 희극적인 것 등을 들고 있다. 흥미롭게도 <페르귄트>에는 이 용어들에 해당하는 요소와 양식이 모두 들어있다. 헌데 <페르귄트> 1867년에 창작되었으니 입센은 그로테스크 미학이 문예 작품들의 이해에 중요하게 등장하기 전 이미 그로테스크 미학을 선취했다고 할 수 있겠다.

페르 귄트의 '반 영웅적' 속성 때문에 드라마 속 이 인물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유럽을 파멸로 이끄는 동안 아리안족의 수퍼 영웅으로 둔갑했고, 트롤들은 공공연하게 유대인으로 해석되어 공연되기도 했다. 이렇게 왜곡된 형식으로 <페르 컨트> 1914년부터 1930년까지 베를린에서만 700회 이상 무대화되었다. 독일 전체로는 1933년부터 종전까지 1,200회 이상 공연되었고, 영화 버전이 세 가지였으며 1938년에는 오페라로도 변형되었다.

입센은 <브란>에 이어 <페르 귄트>를 통해 고국인 노르웨이와 그곳에서 보냈던 자신의 과거로부터 세경과 해방을 맛보았으나 후자의 경우 스칸디나비아 이외에서 거의 이해받지 못한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오늘날 입센은 어느 작품보다도 <인형의 집>과 더불어 <페르 귄트>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페르 귄트>의 한국초연은 1976년 이진순 연출로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 평양 대극장보다 더 큰 극장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건축되어 1973년 개관한 극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아마도 대작이었기에 레퍼토리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에는 예술의 전당과 극단 반딧불이가 공동으로 기획하여 서울 연극제 자유 참가작으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서 <솔베이지의 노래>(임경식 번역/연출)란 제목으로 상연되었다. 2009년에는 LG아트센터가 제작하여 극단 여행자의 출연진을 중심으로 이 극단의 대표인 양정웅이 연출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연극 대상과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자 두 작품 모두 원작에서 많은 삭제가 이루어 졌고, <솔베이지 노래>는 근본적으로 낭만적인 해석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양정웅의 <페르 귄트>는 동시대성이 그 근간이었다. 경사진 거대한 거울과 뒷벽에 세워져있고 사각의 바닥에 흙이 깔려있는 무대에는 조그마한 세발자전거, 원색의 아기 욕조와 사다리가 배치된 놀이터가 묘사되었다. 이런 무대 덕에 원작의 장면들은 삭제되거나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입센의 원작에 들어있는 장대한 시적 어조와 문장들은 애초부터 설 자리가 제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트롤들이 페르 귄트의 옷을 벗기고 꼬리 달린 커다란 기저귀를 채우는 파르스적 장면이나 '트롤타임즈', '시사트롤'과 같은 동시대적 단어들도 가능하고 무리없이 보였고 들렸다. 양정웅의 연출 스타일이 그렇듯 외피적 변형으로 아쉽게 삭제된 부분들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매끄럽게 정리된 점, 다양한 이미지와 스펙터클, 배우들의 훌륭한 앙상블 연기는 칭찬할 만한 프로덕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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