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심사평 – 임선옥·평론가, 오경택·연출가
응모작은 여전히 비슷한 세상을 담고 있었다. 질병, 실직, 죽음, 가족 해체, 주식과 코인, 세대 갈등, 혐오와 차별, 인공지능 등 현실에 나타난 다양한 현상을 통해 탐욕과 위선, 인간과 기술의 관계, 사회에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과 부조리한 삶 속에서의 무기력함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다수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여된 채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스케치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본심에는 3편이 올랐다.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전국학생그림대회에서 우승한 그림이 학교 이사장의 비리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이를 철회시키려는 학교 당국과 부당함을 제기하는 학생의 논쟁을 통해 공정과 정의가 소실된 세상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늑장’은 의무적으로 ‘희망’을 죽여야만 국가의 성실한 인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희망을 거세당한 세대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씁쓸하게 묘사한다. 두 작품 다 장면 구성과 사건 전개, 인물 간의 충돌을 안정감 있게 구축하고 있으나 소재의 기시감, 극적 행동의 비약, 익숙한 결말 등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빛나는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당선작 ‘착해빠져선’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한 학생을 둘러싸고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관계와 소통의 불가해성을 섬세하고 솔직하게 펼쳐놓는다. 인물들 간의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는 대화와 침묵으로 생성되는 묘한 박진감이 돋보였다. 다소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미덕이 이를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큰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의 여정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희곡 당선 소감 - 정희정
첫 줄은 늘 어렵습니다. 그간 어떤 날,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모두 적으면 일기장이 될 것 같아서 미련하게 어제를 버텨 오늘이 올 수 있었다고, 다행이라 적겠습니다. 결국, 밤을 견뎌야 하는 일 같습니다. 어렸을 적, 방에 가족을 불러놓고 동생과 말도 안 되는 공연을 한 기억이 납니다. 외우지도 못한 대사를 스케치북에 적어 읽으며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저도 기억을 못 하지만, 본 사람 아무도 기억을 못 합니다. 그럼에도 그때, 스스로 의심 하나 없이 무작정 쓰던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할지조차 고민이 될 때, ‘너는 죽이고 싶은 사람도 없니’ 교수님께 들었던 그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러곤 괜찮다고 넘겼던 일에 괜히 분노합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지난번, 상자에 귤 하나 썩은 걸 그냥 두었더니 몇 개가 더 상해 버렸어요. 관계 속에서 살면서 사람에게 상해버린 사람들에게, 박수는 못 받아도 기억되는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좋은 작품들 속, 저의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이야기, 오가는 술잔으로 나를 생기 돋게 해준 사람들, 친구들 고마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께도 감사합니다. 읽는 사람이 있어,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특히, 늘 의지가 되어주는 가족에게 매우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딸, 언니로서 조금은 자랑이 되었으면 해요. 하고 싶은 것을 해서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첫 줄만큼 마지막을 내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저 성실하게, 끝까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희정
-1992년 충주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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