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사량 '호접, 66년의 침묵'

clint 2023. 1. 1. 11:06

 

 

줄거리

<호접>194112월 태항산의 호가장 전투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다루고 있으며, 34장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중국 팔로군 지역과 일본군 점령지역 경계 화북 지대의 마을에 조선의용군들은 선전활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이때 이 마을의 구장이 밤중에 일본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일본군은 새벽에 이 마을을 포위하였다. 급습 당한 조선 의용군들은 항전하면서 포위를 뚫었고, 팔로군들이 오면서 일본군이 후퇴하고 전투는 끝이 난다. 이 작품에는 유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인물상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으며, 삶과 죽음에 선 인물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인간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의용군의 삶이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한층 나은 인간성의 실현과 그로인한 해방임을 보여주고 있다.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 시절의 김사량

 

각색의 글 - 김제민

<호접>은 호가장 전투의 실화를 다룬 희곡이다. 작품 <호접>과 그 작품을 둘러싼 사실과 증언을 바탕으로 각색했습니다. 무대에 작가 김사량과 실제 호가장 전투에 참전한 김학철을 등장시켰습니다. 지나간 시간의 망각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작품 <호접>1946년에 공연되었습니다. 그리고 66년간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해방 되어 가까스로 빛을 보게 된 작품이 해방공간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공감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목을 '호접'에서 '호접, 66년의 침묵'으로 바꾼 이유입니다.

김제민

 

 

드라마터지 - 정영경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듯 호접의 거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호가장을 다시 경험하였다. 호가장 전투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김사량이 쓴 호접의 인물들. 김사량이 쓴 호가장 전투를 침묵으로 다시 쓴 지난 60여 년의 역사 속 사람들. 지난 시간을 거슬러 이 여정을 보았습니다. <호접>의 인생은 해방공간의 혼란과 아픔, 그 비극과 궤를 같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겹 위에 지금의 우리가 서 있음을 보았습니다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이제 기억하려 합니다. 침묵되었던 <호접>에 대한 보상, 그것은 시대의 아픔을 지고 살아갔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며, 결국에 현재 영웅이 아닌 우리 삶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인간이 가진 능력 중 최고는 다른 인간을 공감할 수 있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 공감한다는 것은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만큼의 깊이를 갖는 것 같습니다. 몇 개월 만에 그 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목소리에 모두가 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다른 시대를 공감하는 과정에 집중했던 시간이, 같은 공간을 딛고 산 지난 사람들의 노고에 조금은 빚을 갚은 느낌입니다.

 

 

호가장 전투

 

역사적 진실

김사량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한 문학가였기에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 중 <호접>이라는 작품은 해방 직후 남과 북에서 출판되거나 공연되었고, 해방 1주년 기념 (1946)으로 발간한 희곡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후 <호접>은 북에서는 정치적 문제로 잊혀진 작품이 되었고, 남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김사량의 책을 소지하는 것 자체가 간첩행위로 여겨져 그의 작품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이북작가의 작품들을 남한에서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호접>60년 가까이 묻혀야 했던 작품이다. 이러한 비극은 분단 이후 냉전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김사량은 19455월 북경을 탈출해 연안으로 가는 도중, C동무를 통해 호가장 전투를 전해 듣고 그의 기행소설 <노마만리>에 상세히 기록했고 후에 많은 부분을 호접에 사용하였다. 호접은 19461월 해방공간에서 공연된다. 같은 해 2월 김사량은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간다. 19506.25전쟁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활동하는데, 그 후에 그는 기록상에서 사라지면서,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좌우익 대립이 심화되고, 1947년 본격적으로 좌익 예술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호접>은 사라진다. 그리고 66, 긴 침묵의 시간에 맡겨진다.

호가장 전투는 19411212일 새벽 화북 석가장 근처 원씨현 호가장 마을에서 일본군 1개 중대와 황협군 1개 대대 총 600여 명이 30여명의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원들을 기습공격하면서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병 18명이 사살되었고, 조선의용군 4명이 전사, 2명 부상, 1명의 실종자를 낳았다. 호가장 전투에 대한 기록이 사실 전달에 머물러 있을 때, 이 사건을 피부에 가까이 다가오게 해준 사람이 김학철이란 인물이었다. 호가장을 경험한 실존인물로서 그가 남긴 많은 말과 글, 한 다리를 잃고도 꼿꼿이 선 그의 사진은 호가장 전투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감각케 하였다. 김학철 선생은 전투를 회상하며 열 번 하면 아홉 번 지는 전투라 하였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였다. 전투에는 영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태어나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은 현재와 그 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찬옥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1) 2023.01.01
송승환 '난타'  (1) 2023.01.01
문희 '키스 앤 메이크업'  (0) 2022.12.31
김상진 '봄의 균형, 밥의 희극'  (2) 2022.12.28
김상진 '그 봄, 한낮의 우울'  (1) 20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