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보형 '두레'

clint 2022. 11. 27. 15:56

 

1

포구를 곁에 둔 평화로운 검으네 마을에 어느날 소금장수로 가장한 초유사들이 민정을 살피러 온다. 평온함에 젖어 있는 동네사람들에게 소년장수 먹쇠가 등장하여 마을에 돌림병이 도는 것 같다는 조심스런 말을 하자 대동패 영수 및 동네사람들에게 무안을 당한다. 마을에 역병이 돌아 동네 존장인 최생원이 사재를 털어 큰 굿을 한다. 이때 동네에 조정에서 벼슬했다 유배되어온 김학사라는 분이 역병을 물리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써 의원을 불러온다. 한편, 김학사를 미워하는 최생원은 김학사를 무시하고 김학사를 따르는 먹쇠에게 굿을 방해한 죄로 주리를 틀게한다. 김학사와 최생원은 서로 마을을 위하긴 하나 대립적 입장에 있다. 오용리로 방아대를 훔치러 갔던 바우가 오용리 두레들에게 끌려온다. 이에 먹쇠가 검으네. 오용리 두 주리를 한몸에 받겠다고 자청한다.

2

풍년가와 함께 팔월 한가위의 흐뭇한 농촌 풍경과 횃불놀이, 씨름, 강강술래, 농악패와 함께 검으네 마을에 풍요가 흘러넘친다. 마을에선 팔월 추석 놀이가 한창이나 유배되어온 김학사와 단실이는 한양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이때, 먹쇠 추석 음식을 가지고 와서 이들의 시름을 달랜다. 단실, 먹쇠 갑사댕기를 주며 사랑을 고백한다. 이에 숨어보던 곱단, 마을 처녀들이 이들을 놀려대자, 먹쇠 도망치듯 사라진다. 이를 숨어보던 오리 두레들이 홰를 놓고 놀려대며 의식적으로 단실이만 남겨 놓는다. 오용리 대동패 영수 장쇠가 단실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거절당하자 강제로 보쌈을 한다. 이때, 숲에서 시커먼 그림자 몇이 장쇠 일행을 때려눕히고 단실을 들쳐업고 사라진다. 또한 뒷산길에서 곱단이는 왜병에게 칼을 맞고 마을처녀 하나는 그들에게 끌려간다장쇠는 검으네 사람들에게 붙잡혀 곤장을 맞는다. 먹쇠가 등장하여 수암리에서도 처녀들이 없어져 왜구들 소행인 것 같다고 알린다. 숲 주변에서 게다 및 증거물을 발견하고, 최생원은 검으네 두레들을 불러 모으고 오용리 두레들에게도 합세하라고 권유하나, 그들은 왜구와 싸우는 일은 관가에 맡기자고 거절한다. 이에 최생원은 아녀자들을 피신시키고 날 밝는대로 출정을 지시한다. 이때, 산길을 도망가던 장쇠 일행이 죽은 곱단이를 데리고 들어오며, 최생원은 오열한다. 이에 검으네, 오용리 두레들은 출정을 결심한다.

희뿌연 여명 속 왜구들이 있는 포구로 향하던 중 오리 두레들도 이에 합세하여 대합창을 부르며 행진한다. 왜장은 납치해 온 단실의 미모에 반한다. 단실은 왜군의 무례함을 꾸짖고 풀어줄걸 요구한다. 왜장이 단실을 겁탈하려는 찰나, 먹쇠가 뛰어들어 왜장을 사로잡는다. 왜장은 협상을 요구하나, 먹쇠는 이를 거절, 왜장 이를 비웃는다. 관군들이 등장하여 왜장을 풀어주고, 먹쇠를 도리어 없이 싸웠다 하여 포박한다. 이에 두레들이 반발하자 개똥이와 김학사까지도 처형을 하려 한다. 이때, 특사가 황급히 뛰어들어 병사를 봉고 파직시키고 어서를 내린다. 5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좌상으로 상경하라는 내용이다. 김학사는 최생원 및 마을사람들을 용서하고, 먹쇠에게 서울로 올라갈 것을 권하나, 먹쇠는 땅 일구며 땅 지키는 것을 본분으로 알겠다며 남을 것을 고집한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며, 두레의 근본인 협동 정신을 잊지 말라는 합창과 함께 막이 내린다.

 

 

작가의 글 / 이보형

민속조사 차 풍광이 뛰어난 남해안을 따라 돈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가슴을 치는 것은 때도 없이 바다를 타고 오는 도적들의 무서운 난리에 대한 이야기, 난리를 만나 스스로 나가 싸웠던 이름 없는 영웅들의 장렬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 사문난적으로 몰려 외진 땅에 유배와서 못 다한 뜻을 펴고자 평생을 바친 선비들의 슬픈 행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들에 핀 꽃처럼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저 구전하는 설화에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오히려 해풍에 시달려도 영롱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바닷가의 이름 모를 꽃처럼 끈질긴이 고장 사람들 생명력과 뚝심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국난에 처할 때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들의 힘이라 하거니와 백성들의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전라남도 여천군에 현천리가 있다. 속칭 감으라 이르는 이 마을은 여수에서 북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바다를 막아 육지가 되었으나 옛날에는 배가 닿는 포구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현 소동 놀이라는 이름으로 이 마을 두레패의 놀이를 들고나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탄 바 있거니와 이 마을의 두레는 다른 고장의 두레와 달리 옛날 두레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주목되었다. 두레라 하면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는 어느 고장이나 두레가 있지만 흔히 두레와 두레풍장과 혼동하는 것 이다. 두레는 지역 주민들이 큰일을 치루어 내기 위하여 조직하는 조직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일감에 따라 김매기 두레」 「모심기 두레」 「질삼 두레」 「풀베기 두레등 여가 가지가 있다. 두레를 조직하는 것을 일러두레 싼다」 「길 짠다」 「대동 차린다등 여러 가지로 이른다. 두레풍장은 두레패들이 치는 농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는 두레를 품아시 정도로 간단한 조직으로 알고 있으나 본디 두레는 수십 명이 영좌 영수 소고 나발쇠 곤장쇠 등 여러 가지 소임을 나누어 맡아 규율이 매우 엄격한 조직체를 이루었다. 셋째는 두레가 의식과는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본디 의식이 따른다. 두레를 차릴 때는 당산에 나가 농기와 영기를 세우고 농신을 받는 의식을 행하고 나서 농기에 농신을 모시고 엄격한 의식에 따라 행동하였으나 뒤에 신앙의식이 퇴화되어 버린 것이다. 감으내 즉 현천리 두레에는 성인 남자로 짜여진 대동두레(대동패)가 있고 소년들로 짜여진 소동두레 소동패 풀베기 두레가 있고 아녀자들로 짜여진 질삼두레가 있었다 한다. 특히 대동두레와 소동두레에는 엄격한 조직과 규율이 있었고 이 규율에 따른 의식이 엄격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한다. 따라서 두레의 규율은 종교적인 의식이 딸리고 규율이 엄하였던 만큼 두레의 기능이 대단히 컸다. 감으내를 비롯하여 남해안 지역의 두레가 다른 고장에 견주어 신앙의식과 엄격한 조직과 규율이 보존되어 온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고장 사람들이 지정학적으로 잦은 난리를 겪는 동안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두레를 키워 온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남해안을 돌며 들은 것이지만 대동두레 이야기와 난리 이야기는 함께 나오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연천군 감으내에도 나는 갔다. 두레패들의 민요도 들었고 두레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도 들었다. 마을 노인들의 말과 같이 국사봉 높은 봉우리 밑에 연화분수라고 하여 물에 뜬 연꽃 형용이라 일러 오는 기막힌 마을 풍광을 보며 두레를 이끌고 싸웠던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냥 전설로 묻혀 버려도 되는 것일까? 또 이 외진 땅에 유배되어 못다한 경륜을 펴고자 노력한 선비들의 이야기는 그냥 흘려버려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어깨를 짓눌러왔다. 두레패를 이끌고 싸웠던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그러했고 이지함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김정호 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한알의 밀알이 되어 이 나라 백성의 끈질긴 생명력이 커나간 것이 사실일진대 두레의 문화는 오늘에도 살아있는 것이고 또 살아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제 고장을 위하여 한알의 밀알이 되어 살아지는 이야기를 극으로 꾸며 보았다. 그래서 <두레>는 흥겨운 두레풍장에 견주어 매우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꾸며졌다. 아울러 두레문화를 오늘에 살리기 위하여 두레패의 의식과 풍랑과 싸움을 끌어 들었다. 그러나 이같이 수십 명이 돌아가는 방대한 두레패의 움직임, 특히 대동두레와 소동두레의 규율과 의식, 두레패끼리 벌이는 싸움. 두레패와 도적떼와 벌이는 전쟁과 같이 수십 명이 돌아가는 방대한 두레패의 움직임은 무대공연에 어려움이 많다는 의견과 주인공이 싸움에 목숨을 잃는 비극적 결말은 두레풍장의 흥겨움을 덜어버린다는 의견에 따라 당초 극 <두레>는 처음부터 재구성되었다.

 

이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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