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모든 재산이 먼 친척으로 가서 집도 없고 무일푼으로 남게 되자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녀는 아름답고 세련된 젊은 여성으로, 다른 선택권이 없어서 그녀의 전 집인 이스트 린을 산 변호사 칼라일과 결혼한다. 불행히도 칼라일의 누나 코넬리아도 이스트 린에 살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과 가정을 물려받음으로써 이사벨의 새로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칼라일은 매우 친절한 사람으로, 이전에 그와 결혼하기를 바랐던 아가씨 바바라 헤어와 친분을 맺었던 사람이다. 이자벨은 열심히 일하는 변호사 남편, 그리고 그녀의 어린 자녀들로 행복한 가정을 이뤘으나 귀족이지만 가난하고 야비한 레비슨의 꾐에 빠져 함께 도망가게 된다. 그녀가 남편의 바바라 해어와의 우정을 천하게 의심하고 레비슨의 못된 해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레비슨과 집을 나간 후, 그녀가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와 결혼할 의사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녀를 버린다. 그후, 그녀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사벨 부인은 기차 사고로 크게 다쳤고, 아기는 죽었고, 그녀는 잘못 죽은 것으로 보고 되었다. 이 뒤를 이어 이사벨은 변장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전남편과 그의 새 아내(바바라 해어)의 가정에서 가정교사 직을 맡을 수 있게 되어 아이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어린 소년 윌리엄이 결핵으로 사망함에 따라 큰 불행의 원인이 된다. 레비슨은 할리존 씨를 살해한 죄를 지었지만, 바바라의 동생 리차드 해어는 그 살인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피 할리존이 마지못해 증인으로 참여하는 아주 재미있고 극적인 재판이 열린다. 레비슨은 투옥된다. 몇 년간의 고생과 사고는 결국 이사벨을 약하게 만든다. 임종 때 그녀는 자신을 용서하는 칼라일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이스트 린」 (East Lynne)은 요즘에 우리가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자주 접하게 되는 멜로드라마의 한 형태의 원형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이다. 이 작품 안에서는 여인들의 질투와 악인의 음모가 곁들여 져서 평화로운 가정이 상처를 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국에는 인과응보가 이루어지고 정의가 회복되어 관객이 도덕적인 교훈을 얻지만, 그 과정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가운데 인물들은 과잉된 정서를 보이는데, 요즘에도 우리는 이런 형태의 드라마들을 텔레비전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희곡 <이스트린(East Lynne)>은 헨리 우드 부인(Mrs. Henry Wood)의 소설을 파머(T. A. Palmer)가 희곡으로 각색한 것이다. 본명이 엘렌 프라이스(Ellen Price)인 헨리 우드 부인은 1814년에 태어났고, 22살 때인 1836년에 헨리 우드와 결혼했다. 188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삼십 편이 넘는 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트 린」이 연극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1862년부터였다. 미국인 여배우 루실 웨스턴(Lucille Western)은 이 소설을 연극으로 공연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이후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여 공연하였다. 각색자의 이름이 알려진 대본들 외에 익명의 작가들에 의해 각색된 대본들도 19세기 말까지 아홉 편 가량이 되었다고 하니. 이 작품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스트 린은 20세기 초반에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고, 심지어 1970년대와 80년대에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많은 각색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파머에 의한 대본이었는데, 이것은 1874년 11월에 처음 공연되었다. 이 공연에서는 파머 자신이 마운트 세번 경의 배역을 맡아서 출연하였으며, 그의 아내도 하녀인 조이스의 역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파머는 지방극단의 배우이자 극작가로서, 열 편이 넘는 희곡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트 린」은 개연성이 부족한 등퇴장과 작위적 줄거리 등의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받기도 하지만, 질투와 후회, 여인을 유혹하는 바람둥이, 어린이의 죽음 등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로 풍부하게 채워져 있어서 매력적인 작품으로 사랑받기도 한다. 특히 변장하고 자신의 정체를 속인 채 사랑하는 사람들 주위에 나타나 그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우리가 드물지 않게 접하는 어떤 멜로드라마적 형태의 원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이 그 시대의 정치나 선거 풍토에 대한 언급을 제공하고 있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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