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소포클레스 원작 이헌 재창작 '이오카스테 '

clint 2022. 6. 11. 20:50

 

 

 

2004년 제6회 옥랑희곡상 수상작인 이헌 작() '이오카스테 - 신들린 여인'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원작으로 재창작 했으며 신화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이오카스테를 극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그녀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인간의 위상을 지켜낸 과정을 그려낸다. 극중 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무대에 텔레비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미디어에 의해 규정된 허상이 현대인에게는 이오카스테를 옭아맸던 운명의 소용돌이처럼 작용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낸다이 작품은 '신들린 여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남편 라이오스가 아들인 오이디푸스에 살해되고 그 아들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은 비극의 주인공인 이오카스테의 시점에서 씌어진 작품으로 오이디프스 왕의 숨겨진 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은 묘미를 느끼게 한다. 6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장면의 구성이 탄탄하고, 힘 있는 대사와 인물의 성격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단숨에 극에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오카스테의 지나치게 긴 독백들 이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어 압축되었으면 한다.

 

 

작품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동시대 관객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원전 <오이디푸스 신화>에는 세 가지의 꼭지점이 있다. 신탁/ 운명/ 인간의 오만다시 말하면,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리라는 신탁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오이디푸스였지만 다시금 그 굴레를 쓰게 되는 운명, 신탁을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것을 알았을 때 눈을 찌르는 오만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 <이오카스테>에서 신탁과 운명이라는 두 꼭지점을 신화에서 그대로 차용한다. 작가는 하나의 명제를 선택하는데 그것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신탁의 모티브에서 파생된 가정: ‘라이오스가 신탁을 피하기 위해 자식을 버리지 않았다면, 아들이 예언을 피하기 위해 양부를 떠나지 않았다면 서로 알아보지 못한 부자간에 존속 살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저항 자체가 그 운명을 만들어 갈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세 꼭지점은 그 운명에 침묵하고 있던,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관점 또는 입장에서 변환되며 인간의 운명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저항이 이오카스테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

 

 

연극 이오카스테는 이 비극의 암전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 여인, 이 비극적 사건의 또 한명의 중심인물, 이오카스테를 주인공으로 내새운다.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자신의 자식의 자식을 낳아준 어머니. 어떤 악행도 스스로 저지르지 않았으나 상황과 우연에 의해 사회적 도덕 속 악인이 되어버린 여인. 연극은 그녀가 겪었을 상황 마다의 감정선을 유려한 신화적 언어를 통해 풀어낸다. 연극 이오카스테의 그녀는 허무히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얽매고 목을 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갈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저주받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그냥 이오카스테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연극 속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신들이여, 이제 이 가련한 피조물의 분노를 보라! 나는 그 무력함으로서 분노하노라! 운명의 이름으로 인간을 희롱하라! 그러나 나는 너희의 정의도 운명도 권세도 부정한다! 더는 너희에게 호소하지 않을 것이다! 자비도, 파멸도!

극 중 그녀가 생동하기 위해서는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몇 가지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중 첫 번째가 그녀의 전남편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이다. 원래는 희곡 중 한번도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의 회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그이지만 이오카스테안에서는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의 등장은 그의 갓난쟁이 아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취할 것이라는 신탁과 함께한다. 라이오스는 이 저주스러운 신탁 앞에서 아들을 마주보기 괴로워하고, 아들이 자신을 죽일 운명을 두려워하고, 아들이 아내를 취할 것에 증오한다. 결국 그가 택한 삶의 방향은 왕으로서의 관대함도, 아버지로서의 자비도 아닌, 한 명의 남자로서의 질투와 두려움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신탁을 거부하고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내가 신들의 뜻에 따른다고? 천만에, 나는 그들에게 저항하여 싸울 거요. 내 방식대로. 신들이 내 자식에게 저주를 내렸다면, 생명을 준 아비의 손으로 그 저주를 거둘 것이오. 이러한 라이오스의 행동에 이오카스테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지키고자 하나, 결국 그녀는 어머니이기보다 아내이기를 택한다. 훗날 두 번째 남편이 되는 오이디푸스에게도 그러하듯,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이기보다는 아내였으며, 아내이기보다 지금 손안의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명의 여자였다. 라이오스를 통해 드러나는 복합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이오카스테, 이것이 이 연극이 새로워지기 위한 첫 번째 요소이다. 두 번째 요소는 예언자 테레시아스이다. 원작에서는 그저 신탁의 해석만을 밝히고 사라지지만 극중에서는 이오카스테가 새로운 결말을 맞는 원인이 된다. 그의 신탁의 해석이라는 행위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당연하겠지만 예언자로서의 의미이다. 그러나 단순히 해석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진실을 보여주고 증거와 증인이 동시에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대 자신이 그대의 재앙이오. 내가 진실을 보여주겠소. 테레시아스는 진실을 보여주겠다고 말한 후 정말로 진실을 보여준다. 그 스스로 죽어버린 라이오스가 되어 과거 오이디푸스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건을 그의 몸을 통해 보여줌으로서. 마치 접신한 무당처럼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죽어버린 왕, 죽어버린 남편, 죽어버린 아버지 라이오스가 되어 무대 위에 등장한다. 둘째는 복수자로서의 의미이다. 원작의 테레시아스가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둔 예언자로서만 기능한다면, 극 중의 테레시아스는 그 자신이 과거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에게 범해졌던 것을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처벌함으로서 되갚는다. 예언자로서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에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 심지어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러 스스로 처벌받은 오이디푸스를 죽음으로 재차 처벌하는 것이다. 신탁의 예언자로서의 도덕성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피해자로서의 부도덕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그 스스로 처벌받았기에 동정받는 오이디푸스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적 도덕의 화신으로서의 의미이다. 테레시아스가 복수자로서 오이디푸스를 처벌하긴 하지만 극중에서 테레시아스 본인의 감정이 강렬히 드러나는 일은 없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조차 냉정하다. 개인적 복수자이기 이전에 예언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처벌을 감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테레시아 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속한 테베의 시민으로서, 테베 도덕의 대행자로서, 신의 대리자로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한 오이디푸스를 처벌한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취한 부덕자 오이디푸스를 죽여라. 이 사형집행은 테레시아스 본인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익명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즉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이끌어 내고 명령한 것은 예언자이자 복수자이며 사회적 도덕의 화신인 테레시아스이지만 실제로 그를 죽이는 것은 테베라는 사회 전체이다. 이제 예정에 없던 죽음은 예정에 없던 삶을 낳는다. 하나의 죽음, 혹은 하나의 추방이 있어야 이 재앙을 면하리라. 테베에 전염병이 일어났을 때, 오이디푸스 본인의 말이다. 원래 추방되었어야 할 운명의 오이디푸스가 죽게 됨으로 죽었어야 할 운명의 이오카스테가 살아남게 된다. 이 저주가 나의 죽음으로 끝이나기를.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그 스스로의 말이 저주가 되어 죽게 되고, 그 저주는 축복이되어 죽어야할 이오카스테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과 변경된 결말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세 번째 요소인 스핑크스이다. 단순히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다뤄지는 원작에 비해 극중의 스핑크스는 매혹적인 동물이다. 반인반수의 여성, 인간을 벗어나 있지만,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 스핑크스는 무대 위에서 살색 실크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감싸고 암사자처럼 뛰어오른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숨겨진 진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일까.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를 유혹한다. 수수께끼를 갖고 태어난 자, 오이디푸스여. 내게 오세요. 당신께 태고의 비밀을 보여주겠습니다. 순결한 오이디푸스여, 말 못 할 꿈이 아니면 인간들에게 나타날 수 없는 내가,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겁니다! 나에게 오세요. 어서. 오이디푸스는 이 유혹을 거부한다.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처럼 매혹되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잡아먹히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적인 도덕과 사랑의 숭고함을 말하면서 스핑크스를 단호하게 떨쳐낸다. 오이디푸스의 거부에 죽어가는 스핑크스는 축복의 말로 저주를 건다. 당신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맞게 된다. 한명의 죽음과 한명의 추방,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추방자 이오카스테는 테베의 입구에서 다시 태어난 스핑크스를 만나게 된다. 마치 이방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스핑크스는 죽음에서 새로운 몸을 얻어 태어난다. 오이디푸스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죽게 되었고, 또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길게 끌며, 온몸에 파란 꽃을 피운 채. 그녀는 묻는다. 오이디푸스의 사랑 때문에 살아남게 된 또 다른 여인에게. 이오카스테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렇게 괴물과 인간이 마주선다. 그 둘은 같은 사랑을 했고,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은 같은 존재이다. 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를 마주하고 놀라 말한다. 너는 나로구나. 이렇게 이오카스테는 원작에는 없었던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작가의 말 - 이헌

도대체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대에 있건 무대를 바라보건 간에 말입니다. 인생이 무대고, 무대가 인생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 안의 사람은 - 우선 저부터가 배우라기엔 연기가 서툴고, 작가라기엔 대사가 형편없습니다. 아마 그게 우리 세상의 연출 의도인 듯합니다. 그러나 무대 공포증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뿐,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배우도 나쁜 작가도 없을지 모릅니다. 정작 자신은 그 상황에서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나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나 하면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 눈에는 그 좌절하는 모습조차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설사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자신의 진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그 진실을 제대로 드러나게하기 위해 다시 노력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잘 꾸며내서 멋진 사람인 척하는 가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세상만사가 삼류 연극이 됩니다. 재미없고 지루합니다. 누구나 세상을 향해 재미가 없다고 꾸짖어대는데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재미없다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진정 비극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바보짓을 하는 광대만큼 재밌는 희극이 또 없습니다. 광대가 무대에서 화를 내면 관객들은 웃게 됩니다. 광대가 모르는 것을 관객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광대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흥미는 더 해집니다. 저도 지금 이 자리에서, 멍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저 사람들이 내게 웃어줄 텐가 하고 고심합니다. 제가 연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 왜 이런 희곡을 썼는지, 알리고자 노력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짧고 전달 방법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이해 받고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갈고 닦은 자신의 진실을 구현하는 겁니다. 어느 부분은 아름답게 연마하지만, 어느 부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면서, 낯선 타인들에게도 내보일 수 있을 정도 로 진실을 완성하던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라는 인물이 대중 속에 갇히지 않고 인상적인 배역으로 무대 위에 바로 서게 된다면, 그게 곧 자아실현입니다. 내가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서 좋은 대사와 훌륭한 연기를 내보인다면 상대 배우 또한 자신을 연기하기 쉬워집니다. 양상들은 각자의 개성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발견함으로서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상대 배우이며 동시에 관객입니다. 재미는 연극인데도 몰라보는 관객이 되면 스스로 삶이 지루해질 뿐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 삶이 재미없는 연극이 되어 이번엔 자기 관객들이 하나둘 떠나십니다. 무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무대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실패한 연극이더라도 다음엔 갈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무대에 세워진 건 운명이라 할 만 하지만, 그 안에서 실패하고 성공하는 건 자유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림 이만, 수상 소식에 다시 인생이 재미있어진 어느 젊은이의 일인극, 막을 내립니다.

이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