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앵무새>는 1898년에 완성되어 1899년에 초연되었으며 1958년에는 오페라로 공연된, 단막의 '그로테스크' 극이다. 프로스페르는 '초록 앵무새'에서 매일 저녁 극단과 더불어 귀족 중의 고상한 손님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데, 이 술집은 보통 술집이 아니라 범죄자 소굴이라 할 수 있다. 파리의 거리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바스티유 감옥으로 민중들이 돌진하기 시작하는 1789년 7월 14일에도 이곳 '초록 앵무새'라는 술집에서는 공연이 펼쳐지고 관객으로 온 귀족들은 프로스페르로부터 욕을 먹거나 의협을 당한다. 이 작품에서 연극은 숨겨진 실제를 반영하는데, 이 술집에서 배우들은 범죄자를 연기하는 반년에 파리의 귀족 층인 관객들은 그들 자신이 실제 범죄자인 줄 모르고 오기 때문이다. 옛날 배우들은 술집에 앉아서 마치 그들이 범죄자인 것처럼 연기하며,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끔찍한 일, 그들이 행하지 않은 무도한 짓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우아하고 고상한 관객은 가장 위험한 파리의 천민들 사이에 앉아있고 싶어 하는 쾌적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술집 주인 프로스페르도 여전히 코미디를 연기하지만, 옛날과는 달리 귀족 관객을 '돼지' 혹은 '천민' 이라 칭하면서 귀족 관객을 맞이하고, 귀족 관객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간주한다. 프로스페르는 언젠가는 농담이 진단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면서 연극용 단도가 아닌 실제 단도를 지니고 있다. 이 술집의 단골인 노게앙 자작은 그가 이곳으로 데리고 온 젊은 귀족에게 "모든 게 농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지만 자네가 이런 말을 실제로 진지하게 듣게 될 수도 있을 거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연극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진지함을 연극으로 간주함으로써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보호해지면서 모두를 혼란스럽게 한다. 거리에서 보면 '초록앵무새'에서의 공연은 한가로운 오락으로 보이며 관객은 거리에서 일어나는 민중들의 행동을 재미있는 빈둥거림으로 간주한다. 이 극단의 인기 배우인 앙리는 늘 열정적으로 범죄자를 연기하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특별히 더 탁월하게 연기를 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 레오카디가 카디냥 공작과 밀회하는 현장을 어떻게 덮쳤는지, 질투심에 휩싸여 어떻게 그를 살해했는지를 연기한다. 그러나 레오카디가 실제로 공작의 애인이기 때문에 모두 앙리가 실제로 카디냥 공작을 살해했다고 확신한다. 앙리는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는 우연히 술집으로 들어오는 공작을 살해하게 되는데, 앙리의 사적인 복수는 애국적인 행동이 되고, 혁명을 위한 봉화로 미화되기까지 한다.
이 공연에서는 비현실과 현실. 농담과 진지함이 공존하고 극중 역할과 실제 모습이 자유롭게 교체된다. 예를 들면 이 극단의 배우인 가스통은 범죄자 역을 하다가 범죄자가 되었고, 반면 그레는 범죄자에서 배우가 되려고 한다. 후작 부인 세브린은 '초록 앵무새'에 와서 창녀를 연기하여 그녀의 남편을 감탄하게 만드는데, 그녀는 그 연기를 통해서 그녀의 실체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조르주트는 창녀를 연기하지만 그녀는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여인이다. 슈니츨러는 예리한 형안으로 유형과 비유형 사이의 비극적인 유사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극 중 역할이 연기자에게 가져다주는 재앙적인 효과와 환상이 지닌 변화의 힘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 연극적인 역할과 사회적인 역할 행동은 서로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살인자, 방화자, 도적, 포주, 창녀 그리고 선동자 역을 하는 배우들은 주어진 역할만을 연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연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귀족 관객에게 욕하는 술집 주인의 공격자 역할도 그렇다. 프로스페르는 허구를 가장하는 것을 즐기며 귀족 관객들에게 모욕을 주지만, 관객들은 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는 귀족을 '돼지'라고 부르고 언젠가 그들이 술 대신에 오줌으로 만족할 날이 오리라", "언젠가 농담이 진담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한다. 프로스페르가 욕으로 만족하는 반면에 다른 배우들은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질 정도로 현실에 근접한 연기를 한다. 배우- 그라세는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와 자신이 저지른 방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젊은 귀족처럼 옷을 입고 등장하지만, 자세히 보면 금방 낡은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드러나는 모리스와 에틴은 결혼식에서 한 도둑질에 대해 너무나 상세하게 이야기해서 그 결혼식의 하객이었던 알뱅조차 이 이야기의 진실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훔친 돈은 돈이 아니라 셈패로 드러나면서 그 모든 것이 연극이었음이 폭로된다. 이 경우에는 증거를 근기로 현실과 가상이 구별될 수 있는 반면에 두 명의 창녀 미슈트와 리포트의 경우에는 역할과 실존이 일치되어 역할에의 명확한 귀족을 방해하다. 색광 역할을 하는 후작 부인 세브린은 실제 그렇기도 하다. 이들은 연기와 실제 ‘나(Ich)'의 차이를 파괴하는 반면에 발타사르는 창녀 역을 하는 성실한 부인 조르주트와 함께 그의 포주 역할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는 창녀를 극중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부인으로 인지하기에 질투심으로 그녀를 죽이겠노라고 말한다. 다른 배우들도 연기와 실제를 인지하는 데 실패한다. 이를테면 실제 아주머니를 살해한 범죄자인 그레는 범죄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 관객의 지갑을 훔친다. 그레는 프로스페르로부터 연기 규칙이 지켜지도록, 다시 픽션의 장으로 돌아가도록 주의를 받는다. 한편 좀도둑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가스통은 현실에서 좀도둑질로 감옥에 갇혀 있다.
프로스페르의 극단은 전문적인 직업 배우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귀족 관객에게는 위협과 공격의 연기로서 강한 매력을 발휘한다. 이 극단의 작품은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되던 1789년 7월 11일에 공연되며 거리의 소음은 술집 안까지 밀려오고 정부의 절대 권력자들이 참수 당하는 것이 보고된다. 이것이 픽션인지 사실인지는 관객에게 불명확한 상태다. 가디냥 공작은 시장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귀족들은 왕궁에서 들은 폭도의 연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록 앵무새'의 손님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 속에서 그들을 구체적으로 위협하는 끔찍한 '즉흥 연출'을 즐긴다.
귀족들은 혁명의 발발로 인해 그들의 실존이 위협을 받기에, 위험한 연극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의 위험성'에 몸을 맡긴다. 귀족들은 범죄자, 혁명가를 자처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현실을 회피하며, 현실에서 의문시되는 것을 극장에서 가상으로 인지한다. 픽션으로 재현된 현실은 그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은 이곳에서 위협적인 상황조차도 실제처럼 그럴듯하게 즐길 수 있기에 공포를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귀족들은 사실상 그들의 현존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지만, 관객으로서 이 확신을 미학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극중의 가상세계가 현실과 반대되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상으로서의 현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귀족 관객들은 혁명을 현실과는 연관성 없는 해프닝으로만 해석하려 애쓴다. 그래서 바스티유감옥의 파괴는 대중에게 '멋진 구경거리'를 제시해주는 단순한 '모험'일 뿐이다.
앙리는 연기에 몰입할수록, 레오카디가 결혼해도 창녀에서 성녀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는 정열적으로 살인자 역을 연기하면서 현실에서는 인지하지 않으려 했던 일, 즉 자신의 아내가 카디냥 공작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연극으로 상연한다. 프로스페르는 그레로부터 레오카디가 공작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되고 앙리의 등장을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다. 그는 앙리가 공작을 연극에서 살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해했다고 생각하고, 앙리에게 도망가라고 충고한다. 공작이 나타났을 때 앙리는 픽션에서 이루어진 살인을 현실에서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공작을 살해한다. 그렇지만 픽션에서 현실로의 변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공작을 살해한 자는 민중의 친구'라는 찬사를 받게 되면서 그의 살인은 미화된다. 이러한 의미 변화는 후작부인 세브린에게서도 일어난다. 그녀는 공작의 죽음을 직면하고서, 실제로 공작이 살해되는 것을 매일 볼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이 사건을 통해 '쾌적한 성적 자극’을 받는다. 자신의 몰락에 대한 불안은 에로틱한 욕구에 의해 해소되면서 그녀는 롤랭에게 “롤랭, 오늘 밤 나의 창가에서 기다리세요. 얼마 전에도 그랬듯이 열쇠를 던질게요. 아름다운 시간을 가져요. 나는 쾌적하게 흥분되어 있음을 느껴요"라고 말한다.
슈니츨러의 그로테스크 극은 극중 인물들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조된 실존의 '상반 감정‘을 어떻게 만나려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혁명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연극을 통해 인지하려 하며, 이런 방식으로 현실에서 위협적인 것을 연극으로써 미화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 보여준 프랑스 귀족들의 태도는 절대군주의 쇠퇴뿐만 아니라 빈 상류층의 '즐거운 파멸'을 반영하고 있다고 슈니즐리는 설명한다. "빈의 상류층은 프랑스의 절대군주와 유사성을 지녔다. 그들은 점잖고, 예술에 심취해 있으면서 피상적이다. 또 그들은 화산 위에서 의식적으로 춤추었으며 주변에서 역사의 엄청난 재앙이 준비되는 동안 사치와 미(美)의 퇴폐적 세상을 즐겼다.”
슈니츨러의 동시대인들은 <초록 앵무새>에서 극 중 프랑스 귀족들의 행동과 실제 삶 사이의 유사성을 인지했는데, 이는 이 작품의 공연이 검열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슈니츨러는 1899년 1월 12일 게오르크 브란데스(Georg Brandes)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썼다. 세 작품이 난관에 부딪쳤는데, 그중 하나가 <초록 앵무새>다. 그들은 베를린에서 이 작품을 상연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곳 궁중 검열은 용인할 수 없는 변경을 원한다. 이 작품은 파리 바스티유 감옥이 붕괴된 날 저녁에 상연된다. 그러나 나는 피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 공작이 살해된 것도 사람들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고 한다.
슈니츨리는 검열이 인지한 것처럼 프랑스 혁명 초기의 파리 귀족과 세기말 상류사회를 계획적으로 일치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다. <초록 앵무새>라는 그로테스크 극은 귀족의 멸망을 주제화하고 있고, 사회 변혁기에 나타난 정체성의 혼란을 해학적으로 보여주는 '거울 진열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안에 슈니츨러의 진지함과 연극, 삶과 코미디 등이 뒤섞인 인간 실존의 모습이 농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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