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상원 '즐거운 봉변'

clint 2015. 11. 8. 12:56

 

 

'녹쓸은 파편' '默殺된 사람들' 같은 장막劇에서 보인 發言과는 달리 小市民 的인 生活의 斷片을 보여주는 단막극이다. '즐거운 봉변'은 권력에 아첨하는 世態를 희화的으로 그린 희극이다. 同名異人인 까닭으로 잘못 찾아들어온 축하 화분이며 선물 때문에 일어나는 世態描寫는 한 토막의 만화를 보여주며 작가의 윤리관을 직설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김기용이란 퇴직 공무원이 근처에 사는 동명인이 장관 입각설이 나오면서 그의 집으로 갈 축하 화분 및 선물이 속속 들어오는데 영문도 모르고 좋아하다가 결국 잘못 배달된 것으로 알게 되고 그 후엔 누가 오는 게 귀찮아지고 먼저 온 선물을 어떻게 전달 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딸 정애가 들어오고, 또 그 옆집 김기용이 장관에 탈락하고 다른 사람이 결정되었다는 뉴스로 이 선물들과 명함을 모두 신문사에 보내 뇌물자를 고발하기로 한다.

 

 

 

 

 

저자 오상원은 1930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했으며, 해방이 되기 전까지 신의주에서 초등·중등교육을 받는다. 오상원 스스로의 술회에 따르면, 해방 이전까지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온 오상원은, 한글은 물론, 민족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마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한다. 단편 <잊어버렸던 이야기>(≪세대≫, 1977. 9)에 나오는, ‘해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꼬마의 모습에서 오상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을 볼 수 있거니와, 다음과 같은 기록도 참고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몰랐으나 수군수군 이상한 소리들이 돌았다. 최상급반 학생들 입에서 나온 말이다. 변소 안 벽에 「チョセントクリツ(조선 독립)」라는 말이 씌어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다. 상급생들은 우리들 입을 가로막으며 쉬쉬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돌아와 그 말을 했다. 그때 얼굴이 갑자기 긴장되며 당황하던 아버지의 표정, 어디 가서 그런 소릴 절대 입 밖에 내면 안 된다고 숨죽이며 작은 소리로 내 귀에 속삭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해방은 오상원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오상원이 해방을 맞이한 것은 중학 3학년 때이다. 오상원은 이때에야 비로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또한 소설을 읽고, 시와 수상을 중심으로 습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상원에게 있어 더욱 중요했던 것은 해방 직후의 신의주에 불어닥쳤던 정치적인 열기였다. 오상원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 오상원은 신의주에서의 정치적 운동에 앞장섰던 사촌형에 의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오상원은 사촌형의 ‘사상’ 자체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 사촌형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는 쪽이 더 타당할 것이다. 오상원이 남긴 여러 회고 및 <균열>, <황선지대>등 그의 신의주 체험이 담긴 소설들을 검토해 볼 때, 신의주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정치적 이념에 대한 깊은 불신과 이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각인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이후 오상원 소설이 다루는 주요한 테마 중 하나가 된다. 이후 오상원은 월남을 단행하는데, 구체적 시기와 방법은 알 수 없다. 월남 이후 오상원은 1949년까지 용산중학교에 재학한다. 용산중학교 재학 시절 오상원은 처음에는 과학 기술자를 지망했다가 이후 문학 지망으로 선회하는데, 재학 중 문예부 활동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상원은 졸업 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입학 직후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오상원은 학도병으로 참전한다. 이 시기 오상원이 겪은 강렬한 전쟁 체험은 오상원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특기할 점은 오상원이 미군 25사단에 배속되어 미군과 함께 전쟁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미군과 함께 전투를 겪으며 얻은, 미국에 대한 인식들은 <난영>, <죽음에의 훈련>과 같은 작품에 직접 반영되며, 오상원 소설 세계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룬다. 다음과 같은 회고는 ‘전쟁 체험’, 특히 ‘미군’과 함께 한 그 체험이 오상원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그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그 산 증인이 되어야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양키 레이션을 뜯어 먹고 양담배를 피워 물고 추우잉검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인민군과 아군의 시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모멸이었다. 부산에 서울대학교 가교사가 생긴 이후, 오상원은 복교하여 1954년 졸업 때까지 불문학을 공부한다. 이 기간 동안 오상원은 실존주의적 문학 비평에 앞장섰던 손우성의 강의를 들으며, 앙드레 말로, 사르트르, 까뮈 등의 실존주의·행동주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그는 이일, 정창범, 홍사중, 김정옥, 박이문, 김호 등과 함께 문학 동인 <구도>에 참여한다. 오상원의 문단 데뷔는 부산에서 <구도> 동인 활동을 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1952년 극협에서 주관한 장막극 공모에 희곡 <녹쓰는 파편>이 당선된 것이다. 그 뒤 오상원은 유치진의 지도를 받으면서 잠시 희곡 창작을 시도하지만, 자신의 희곡이 실제로 상연되는 것을 보고 실망을 느낀 나머지 소설로 전향한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예>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한 오상원은 이후 1966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1954년에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오상원은 한동안 공보처에서 일하다가, 1959년 조선일보 입사, 1960년 11월 동아일보 사회부 입사를 계기로 언론인으로 변신한다. 4·19를 다룬 미완 장편 <무명기>에서는 기자로서 그가 겪은 체험들이 반영되어 있다.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사에서의 오상원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60년 사회부 기자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963년 방송뉴스부 차장, 1966년 지방부장, 1973년 논설위원, 1978년 안보통일문제조사연구소 상임연구위원, 1985년 연구실심의위원 겸 출판국 편집위원 등의 직위를 거친다. 이 중 오상원의 문학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973년 논설위원직이다. 오상원은 동아일보 논설위원에 임명된 이후, 동아일보의 고정란이었던 <횡설수설>란의 집필을 맡아서, 우화를 통한 우회적인 방식으로 유신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들의 성과는 ≪오상원 우화집≫(삼조사, 1977)의 발간으로 이어진다. 1966년 이후의 오상원은 작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에 더욱 치중하게 된다. 1974년 단편 <모멸>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재기를 의욕적으로 노리기도 했으나,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결국 그는 1981년에 발표된 단편 <산>을 마지막으로 발표한 뒤, 1985년 12월에 지병인 간경화의 악화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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