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사상 처음 거명되는 전업 여성작가 엘리자베스 케리의 대표 희곡이다. 절대왕권과 가부장제의 압력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목소리를 드러내는 여주인공 메리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는 작가 정신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케리는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93년경에 쓴 ≪유대민족 고사 (Antiquities of the Jews)≫ 제15권에 실린 헤롯왕과 유대왕족인 메리엄의 결혼을 다룬 이야기를 소재로 <메리엄의 비극>이라는 희곡을 완성한다.
메리엄은 헤롯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애증의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그의 죽음으로 자신이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헤롯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과 조부를 죽게 만들었다는 비밀지령의 실체를 알게 된 메리엄은 헤롯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다 그러나 헤롯의 귀국으로 과거의 복종하는 삶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자 메리엄은 부드러운 말과 미소로 굴종의 가면을 쓰기보다 그와 정면으로 대항하기로 한다. 미소와 침묵 대신 헤롯의 권위에 도전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메리엄은 자신의 정숙함과 고결함이 어떤 난관에서도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살로메의 간계로 메리엄에게 참수형이 내려지고, 메리엄은 고결함과 정숙함에 대한 높은 자부심이 오만함과 자기애에 기인한 것임을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닫는다. 메리엄은 여성의 죄를 대속하는 순교자와 같은 위상으로 승화하고 무대에는 회한에 찬 헤롯만이 남는다. 헤롯의 무너지는 모습은 가부장제의 근간이 무너짐을 보여 주며, 메리엄의 죽음은 세속의 가치를 벗어난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케리
엘리자베스 탠필드 케리(Elizabeth Tanfield Cary)는 생애가 기록된 영국 최초의 여성 작가다. 1585년 잉글랜드 옥스포드셔의 부유한 법률가인 로런스 탠필드와 엘리자베스 시몬드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지적으로 조숙했던 케리는 독서에 몰두했다. 그녀는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홀로 익혔고 어린 나이에 세네카의 ≪서간집(Epistles)≫을 번역하기도 했다. 17세가 되던 해인 1602년 귀족 가문의 헨리 케리 경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탠필드가는 젠트리 계급에서 귀족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했고, 처가의 재력을 바탕으로 케리 경은 1620년 포클랜드 자작이 됐다. 케리는 결혼 초기에는 영국국교를 옹호하는 후커 (Hooker)나 칼뱅(Calvin)의 글을 읽으면서 부친과 남편의 뜻에 따라 영국국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했지만, 점차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가톨릭 교리에 심취하게 되었다. 헨리 케리는 버킹엄 공작의 주선으로 아일랜드 부총독이 되었으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가톨릭교에 심취한 아내는 아일랜드 주민들을 영국국교도로 개종시키는 일을 하기보다는, 결국은 실패했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다. 아내가 출세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헨리 케리는 큰딸 출산을 이유로 아내를 영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1626년 케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이 궁정인들 사이에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어나게 되고, 제임스 1세는 케리를 자택에 감금하고 개종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케리가 승복하지 않자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딸이 개종한 사실보다 결혼 지참금을 담보로 남편을 위한 자금을 마련한 사실에 더욱 격노한 부친은 딸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큰 외손자 루시어스를 상속자로 삼았다. 케리는 별거하는 동안 아들의 재정적 지원을 가능한 한 적게 받으면서 궁핍하지만 독립적인 생활을 했고, 1633년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다리가 부러져 병상에 누운 그를 보살피기도 했다.
케리는 말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선 행위를 지속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어느 사제의 요청에 따라 플랑드르의 신비주의자인 루이 드 블루아(Louis de Blois)의 글을 번역했다. 그녀는 1639년 54세의 나이로 고통 없이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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