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잉그마르 베르히만 '절규와 속삭임'

clint 2020. 2. 15. 21:08

 

 

 

 

 

 

두 자매들이 아주 정성스레 병든 언니를 공원에 데려가서 가을을 감상하도록 하고 있다. 어렸을 적 함께 타던 그네 위에 모여 앉아, 아그네스는 '행복'을 얘기한다. 그녀의 고통은 안나의 정신적 동행과 위안으로 달래질 수도 있었지만, 보다 근원적인 구원과 자비는 바로 이러한 순간의 은혜이다. 베르히만이 말하는 이 순간, 모두가 충만하고 완벽하게 느껴지는 '한때'. 두 동생들의 얘기에 귀를 열어놓고 자연 속에서 환기되는, 햇살과 공기와 바람에 체화 되는 이 지복(至福)의 찰나, 그것은 분명 그대로 멈춰서 어딘가에 간직해두고만 싶은 드물고도 귀중한 순간이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하고 충만하며' 그 자체로서는 형언할 길 없는 행복의 상태는 또한 덧없이 지나가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한계와 덧없는 삶의 조건에 대한 더욱 강렬한 의식만이 남게 된다. 아그네스가 멈춘 시계를 다시 가게끔 만지는 장면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게 바로 흘러가고 사라져가는 저 순간들의 연속, 즉 시간이라면, '낙원'은 삶 안에서 만나짐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참한 것, 가장 큰 적수는 다름 아닌 삶 혹은 일상 그 자체이다.
"가시적인 모든 것은 어떤 불가시적인 바탕 위에 놓여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귀로 들을 수 없는 바탕 위에 놓여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바탕 위에 놓여 있다"는 노발리스의 말을 떠올려본다. 외침과 속삭임, 뒤범벅된 거짓과 상처들.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은, 플라톤의 말을 빌어, 아마도, 아니 확실히 진실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소 그럴 법하고 진실한 그 무엇이 담기어 있다.

 

 

 

 

 

주인공이 세자매라는 점에서 베르히만의 ‘세자매’라 부르는 비평가도 있으나 아그네스의 하녀인 안나의 비중이 대단히 높아 ‘네 여인의 드라마’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베르히만 자신이 시츄에이션 설명 때 스탭 일동에게 배부한 메모에 의하면 네 여인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다.
“아그네스 : 37세. 부친 옛날에 죽고, 20년전 모친 사망 후 이 대 택에 오래살며 한발도 사회에 나간 적이 없고 연애나 결혼 경험도 없다. 최근 자궁암으로 회복 불가능 상태.
카린(아그네스의 언니) : 39세. 20세 전에 결혼하여 이 집을 떠났으며 5명의 자녀가 있다. 남편 프레드릭은 부유하고 우수한 외교관이나 20세 연상. 결혼 후 곧 자신의 결혼 실패를 깨달았으나 고집스럽게 이혼하지 않고 세상에는 양처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야비함에 항거하여 자신의 몸에 상처 를 내어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마리아(막내) : 성공한 젊은 상인 요하힘과 결혼 도회지에 나가 살고 있고 5살난 딸이 있다. 그러나 마리아 자신도 커다란 애기와 같아 그 바람기에 고민한 남편은 자살까지 기도하나 실패하고만다.
안나(하녀) : 30세 가량. 소박하고 건강한 농민출신. 딸을 낳은 적이 있으나 3살 때 죽었다. 아그네스가 그녀 모녀를 돌보기 시작한 뒤 12년간 이 저택에서 일했으며 아그네스 와는 주종관계 이상의 감사와 우정이라는 특별한 애정 이 흐르고 있다.“

 

 

 

 

“절규와 속삭임”은 1973년 깐느 국제 영화제에서 프랑스 영화 기술 위원회상, 스웨덴의 “황금 봉우리”상, 72년도 전미국 영화 비평가상, 뉴욕 영화 비평가상 등 많은 상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는 각국의 작품명은 거의가 테마를 살리기 위한 베르히만의 디테일의 세심함과 기교의 우수함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즈의 죤․바로는 ‘최근 누벨 바그나 뉴 시네마식의 자유로운 카메라 기법이 때로는 내용의 공허를 감추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이 보이고 있는 고전적 구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입을 겪게 하며 특히 인간 심리를 파헤치는 크로즈업의 메스 같은 날카로움은 예술 그 자체를 느끼게 한다.’ 라고했다.
“절규와 속삭임”에서 베르히만은 씨나리오는 물론 음악의 선택, 세트, 의상의 색조, 디자인까지 모두 혼자 해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의 의상은 백색 아니면 흑색이고 실내의 벽은 농도는 다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색 계통이다. F․O, F․I 까지도 보통의 색조가 아니라 진홍색에서 시작해서 진홍으로 끝낸다. 프랑스이 ‘쥬르․씨네마’지는 칼라와 드라마의 이런 얽힘에 대해 ‘이 영화의 기초는 고통이며 붉은색이다. 자살을 기도하는 인물이 흘리는 피와 벽의 색깔만이 붉은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입고 있는 흰 옷까지도 아이로니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사실은 붉은색인 것이다.’ 라고했다.
로트봘 역시 ‘이 작품의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의미도 없다.’ 라고했다. 등장인물은 모두가 8명. 그 중 남자들의 존재는 전혀 미미하다. 때와 장소도 특별히 지정되어 있지 않고 (실제로는 19세기 말경이며 스톡홀름 80Km 서쪽 메랄호반 언덕위에 있는 오래된 저택에서 촬영) 대부분의 장면은 방이나 복도여서 전형적인 실내극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은 아그네스의 죽음 이외에는 없고 등장 인물들의 상호간의 심리반응과 굴절모습만이 이상하리만치 추구되어 있는 점으로 심리극이라 하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Ernst Ingmar Berg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