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조병 '싱크로나이즈'

clint 2019. 11. 19. 10:06

 

 

 

 

동물원에선 사육사들이 동물들을 돌본다. 때가 되면 먹이를 주고 우리를 청소해주며 아프면 치료해주고 버려진 새끼는 그들이 보호해준다. 그곳에선 늙어죽거나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죽기 전까진 죽을 일이 없다. 모든 것이 통제된 삶 속에서 동물들은 과연 행복할까? 그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에 따라 동물원은 동물들에게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둘 다일수도 있겠지. 천국과 지옥, 어쩌면 그 둘은 샴쌍둥이가 아닐까?

어떤 절대적 힘에 의해 컨트롤된다는 측면에서 천국과 지옥은 마찬가지 개념이다. 그것이 실제 어떤 모습일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천국이란 곳은 모든 인간이 꿈꾸는 어떤 이상향, 절대적 행복과 영구적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인 반면 지옥은 내가 살아서 쌓은 죄악과 업보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디스토피아라는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이 천사들의 보호 아래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고 지옥은 악마들의 감시 아래 죄업을 씻어야 하는 곳으로, 결국 모두 신 혹은 절대자의 권능 아래서 통제된 영역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는 없다. 그 어디서도 나의 자유의지와 예측 불가능한 삶의 혼란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런 면에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는 분명히 갈리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한 몸뚱이에 달린 두 개의 머리처럼 서로 독립적이고 별도로 존재하는 별개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 샴쌍둥이가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죽고 나서 경험하든 살아서 경험하든 천국과 지옥 그 어느 쪽으로도 가고 싶지 않다. 그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무자비한 혼란 속에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선택과 결정을 하며 자유롭게 살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말을 맞이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무한한 행복이 명백한 천국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고통을 영원히 견뎌야 하는 지옥도 내겐 그저 'No, Thank you'. 그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좌지우지되지 않는 복불복 인생 속에서 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사라지는 것, 그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한계가 아닐지.

 

 

 

 

 

조련사 소녀와 맛본 우리 바깥세상의 자유는 코끼리 바비 브라보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늘 우리 안에서 갇혀 지내며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먹고 서커스에서 묘기 부리며 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이라고 알았던 그에게 우리 바깥의 세상과 자유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 전에는 소녀와 함께 한 우리 안에서의 삶이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알고 난 뒤에는 지옥과도 같았겠지. 그의 삶을 통제하고 있던 '우리'라는 공간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기에 그는 자기 눈물에 빠져 익사한 게 아니었을까?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육중한 몸뚱이를 익사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마지막 부분, 기자가 코끼리 바비 브라보의 사인을 밝히는 장면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코끼리 바비 브라보는 자기가 흘린 눈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자유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가 그것을 갈망하는 건 누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어떤 절대적 힘이 존재할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정해놓은 명백한 법칙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그 메커니즘을 모른다. 무엇이 일어나게 되리란 건 알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자유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는 그 자유를 통해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존재가치가 있는 건 바로 그 자유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