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외젠 라비슈 '표적'

clint 2015. 11. 6. 15:31

 

 

 

 

 

19세기 프랑스 제2제정이 나폴레옹 집권 시기 폐쇄되었던 극장들을 정책적으로 개방하고 지원하면서, 프랑스 연극은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해 이른바 '불바르 연극'이 탄생했다. 당시 보드빌 극장(1792)과 바리에테 극장(1803)에서 활동하던 희극작가들은 이후 짐나즈 극장(1820)과 재건된 팔레루아얄 극장(1831)으로 영역을 넓히며 교류했다. 이 극장들은 오늘날 오페라극장 주변의 불바르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발생한 '불바르 연극'은 후에 가벼운 희극을 의미하는 '불바르 희극'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희극의 종류는 불바르 희극 이외에 알렉상드르 뒤마가 시극을 소재삼아 발표한 역사희극과 뮈세의 진지한 희극, 스크리브의 '잘 짜인 극(well-made play)'으로 지칭되는 줄거리 희극, 그리고 뒤마 피스와 오지에의 풍속희극으로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그중 1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며 19세기에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연극은 보드빌(vaudeville)이다. 보드빌은 당시 귀에 익은 가요구절을 작품에 삽입한 가벼운 희극인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츰 노래삽입 구절의 비중이 줄고 나중에는 노랫말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형태로 변모했다.

 

 

 

외젠 라비슈가 1850년 이후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며 발표한 작품들은 후기 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모두 보드빌 희극(comedie-vaudeville)에 속한다. 그는 동시대 풍습을 희화하고 인간을 어릿광대의 익살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작가로, 후대 '보드빌의 황제'라 불릴 만큼 173편이라는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남겼고 그 중 57편이 출간되었다. 그의 연극은 기지에 찬 해학과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유머, 동시대인의 양식(良識)이 녹아있어 프랑스 전통 희극보다 동시대 관객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요인은 그를 오늘날 여전히 프랑스 연극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획득한 독보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했다. 특히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소시민의 어리석음과 악덕을 통렬히 비웃으며 어느 순간 씁쓸한 여운과 함께 비애를 자아내게 하는 그의 고도의 작품성은 보드빌 희극을 원숙한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 대표작<이탈리아 밀짚모자>의 성공 이후 작가적 역량이 가장 화려하게 펼쳐지던 1860년대 초 그가 알프레드 들라쿠르(Alfred Delacour)와 협력해 발표한<표적(Le Point de mire)>(1864)은 노랫말이 완전히 배제된 보드빌 희극으로 풍속희극의 성격이 돋보인다. 영미 권에서<천연 자석(Lodestone)>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이 희극은 콩피에뉴 궁전에서 초연되어 나폴레옹 3세와 왕후 외제니의 찬사를 받은 라비슈의 후기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결혼에서 돈이 사랑이나 인격보다 중시되는 프랑스 사회의 천박한 물질주의를 하나의 게임처럼 풍자하면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결혼문제를 통해 허영과 탐욕에 빠진 동시대인의 의식을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부르주아 중산층의 권태와 속물근성이 드러나는 1막 전면에는 근대 부조리극의 전형으로 불리는 이오네스코의<대머리여가수>의 살롱드라마의 진경이 펼쳐진다. 1막에서 주인공 뒤플랑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친구 카르보넬의 집에 방문해 혼담을 꺼내는 과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침 그남 홈 파티를 준비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부부에게 난데없이 들이닥친 옛 친구, 뒤플랑. 카르보넬 부부는 젊은 시절 경영하던 카페에서의 달갑지 않은 기억을 자꾸 들춰내는 그를 쥐꼬리만 한 연금을 받는 시골 농사꾼이라고 냉대한다. 하지만 그의 형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에게 유산을 상속해 그가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뒤바뀐다. 〈표적>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서로 친분이 있는 두 집안이 평범한 전직 공증인의 아들에게 각자 자신들의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암투와 치열한 작전을 벌이 는 동시에, 점잖은 탈을 쓰고 속으론 탐욕과 시기심, 허영에 들뜬 양쪽 집안 어른들의 간계와 술수가 이어진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게임이 극적 재미를 이끌어 내고 여기에 진실을 쟁취하려는 '무서운 아이들(enfants terribles)의 당돌한 기지가 발휘되어 이야기의 결말을 반전시킨다. 시대적 사실성과 인물들의 개성이 묻어나는 풍속희극의 성격에 따라 부르주아의 경제관념과 생활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작품 속에서, 양손에 떡을 쥐고 갈팡질팡하는 아들 때문에 양쪽 집안의 집요한 공격을 당하며 어릿광대처럼 조종당하는 중심인물 뒤플랑은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희극성과 진한 부성애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특히 극의 대립과 갈등을 주도하는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역할이 뚜렷한 대비를 통해 전개되는 점이 작품의 구조적 양상을 이룬다. 구조적으로 양 축을 이루는 카르보넬과 페뤼진 부부의 대립과 부르주아 기성세대인 부모와 어른들의 불의를 거부할 줄 아는 자식들의 역할 대비가 나타나고, 모리스의 친구로 등장하는 건실한 청년건축가 쥘프리에와 부잣집 백수로 살아가며 바람둥이 기질이 넘치는 에드가르의 성격이 흥미롭게 대비되는 것도 볼 수 있다. 더욱이 작가는 그가 끈질기게 다루던 사회계층인 파리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중산층과 파리 외곽 쿠르브부아에서 화원과 양계장을 운영하는 전직 공중 인이자 농사꾼인 뒤플랑의 생활을 은근히 대비시킨다. 작품의 극적짜임새로 뒤플랑의 아들 모리스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기하하적 대비를 이루고 사건의 교차와 반복이 증폭되면서 점점 미묘한 균형이 생겨나는 원추형구조를 형성한다. 라비슈의 희극적 글쓰기 요소들은 한결같이 인물의 이중성을 표출하기 위한 장치인데, 이 작품에서는 방백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희극의 전통기법 중 하나인 방백은 작가와 관객의 소통수단이자 인물의 진실을 드러내는 놀이적 방법이다. 관객은 이 방백을 통해 인물의 대화와 상관없이 그의 생각과 의도를 잘 알게 된다. 이것이 극 중에 되풀이되면 관객은 그 인물을 두 겹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인물에게 부피와 두께를 형성하고 관객의 객관적 거리두기를 만들어 연극성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준다. 백만장자임이 밝혀지자 때론 교묘하게, 때론 포악스럽게 목표물을 향해 달려드는 등장인물들이 19세기 프랑스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위선과 어리석음의 탈을 쓴 꼭두각시 짓을 하는 하나의 놀이로 비유된 이 작품은, 인류 사회의 영원한 화두인 결혼과 인간의 행복의 조건이 과연 무엇인가를 새삼 되짚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