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닉 페인 '인코그니토'

clint 2019. 6. 17. 14:32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한 실화에서 시작하는 '인코그니토'는 사람, 우주, 기억, 시간, , 인연, 그리고 사랑과 과학을 뛰어넘는 우주의 신비 그림을 그린다. 내용과 구조는 사람의 뇌와 기억을 다루지만 과학연극이라기보다 인간관계, 그 관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고민이다. 기억은 뇌에 정보를 저장하고 유지하고 다시 불러내는 기능을 의미한다. 약호화(encoding), 저장(storing), 인출(retrieving)의 과정을 거친다. 약호화는 외부 정보를 뇌신호로 전환하는 단계다. 뇌에서 처리된 정보는 컴퓨터 시스템의 RAM(단기 저장)이나 ROM(장기 저장)처럼 저장된다. 이후 모니터나 프린터가 정보를 출력하듯 인출되는 과정을 거친다. '인코그니토'는 약호화 11개 장면, 저장 9개 장면, 인출 11개 장면이 나열되듯 이어진다. 여러 이야기와 정보가 뒤섞이면서 관객들은 공연을 '기억의 3단계'를 나눠서 봐야 한다. 이를 통해 수많은 단편이 하나의 이야기로 관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무 살 헨리는 어느덧 여든이 됐다. 그는 뇌수술을 받았다. 발작 뒤에 찾아오는 기억상실 때문이다. 피아노 연주법을 잊었다. 죽은 아내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마지막에 그의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는 말, 기억보다 많은 걸 품고 있다. 연극 '인코그니토(Incognito)' 끝 장면은 환유(換喩)의 풍경이다. 흑백의 피아노 건반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 같은 모양새지만, 음의 높낮이가 다르다. 연주하는 사람마다 소리가 다르다. 어떤 손가락은 가늘고, 어느 손가락은 굵고 뭉툭하다. 똑같은 피아노라도 투명하거나 묵직한 이유다. 환유는 어떤 하나의 사물 또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과 연관이 깊은 다른 걸 이용하는 표현법이다. '인코그니토'는 수많은 환유들로 장관을 이룬다.

 

 

 

 

 

영국의 떠오르는 극작가 닉 페인의 작품으로 이번에 국내 초연인 '인코그니토'는 수많은 조각들로 구성됐다.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뇌'를 빼낸 실존 인물 토머스 하비, 실제 뇌 과학 분야에서 연구사례로 널리 알려진 기억상실증 환자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은 후 동성연인을 만나려고 한 임상 신경심리학자 마사. 세 개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총 31개 장면으로 나뉜다. 기억의 3단계인 인코딩 화 11개 장면, 저장 9개 장면, 인출 11개 장면이 나열되듯 이어진다. 그런데 1995년 미국, 1953년 영국, 2013년 영국 등으로 시공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인코그니토'은 영어로 '자기 신분을 숨기고' '가명으로'라는 뜻이다. 각기 다른 장면들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환유가 된 것처럼 투영되고 반영된다. 뇌가 끊임없이 속임수를 쓴다는 마사의 주장은, 헨리의 기억상실과 연결되고, 헨리의 뇌가 연구대상이 되듯, '우주의 비밀'을 숨겨놓은 듯한 아인슈타인의 '천재적인 뇌'도 집중조명 대상이 된다. 미국과 영국이 배경이고, 뇌 과학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주요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감정의 출렁임은 지극이 일상적이다. 스크린 자막으로 설명되는 연도와 인물들의 이름을 자칫 놓치면 내용이 퍼즐처럼 뒤섞일 수도 있다. 작가 페인은 시간과 공간의 장난꾸러기라 할만하다. 이 작품은 결국 점층법이다. 구절이나 문장에서 환기하는 이미지나 관념의 범위 등이 진행될수록 확장되는 점층법처럼 초반의 자잘한 이야기들은 점차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야기들로 확장되고 막판에 결국 퍼즐로 완성된다. 우리의 인생, 특히 기억이 그렇다. 수많은 조각들로 돼 있고 게다가 '인코그니토' 처럼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있다. 어떤 건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는가. 결국 '인코그니토'의 거대해보일 수 있는 이야기는 결국 각자 인생 또는 기억의 환유다. 그래서 공감이 든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 베케트 '쿼드'  (1) 2019.06.21
사무엘 베케트 '밤과 꿈'  (1) 2019.06.21
닉 페인 '별무리'  (1) 2019.06.16
세르게이 노소프 '차고 넘치는 시간'  (1) 2019.06.13
곽말약 '호부'  (1) 2019.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