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부」는 곽말약이 1942년에 전국시대 ‘절부구조(廳符救趙)’ 고사에서 제재를 취해 창작한 역사극이다. 극에 등장하는 신릉군과 위왕은 ‘항진구조’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물이다. 신릉군은 높은 정치이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단결시켜 진나라의 침략에 대항할 것을 주장한다. 진나라 군대가 한단을 포위하여 조나라가 위험에 빠지게 되자 순망치한의 논리로 위왕에게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것을 간하게 된다. 거절을 당한 그는 여희의 도움으로 호부를 훔쳐 진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나라를 구하는 동시에 위나라도 지켜낸다. 한편 위 왕은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물건 취급하는 인물이다. 그는 신릉군의 건의도 묵살해버릴 뿐만 아니라 신릉군의 재능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병사들을 매복시켜 신릉군과 그의 식객들을 죽이려 한다. 결국 신릉군을 대표로 하는 정의의 힘은 여희와 위태 비, 평원군부인, 후영, 주해 등의 도움을 받아 승리를 거두지만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위태비가 호부를 훔쳐낸 죄를 스스로 떠안으며 자결하고, 후영도 자결한다. 또 안리왕의 총애를 받던 비였던 여희는 자신의 아버지 원수를 갚아준 신릉군을 위해 호부를 훔쳐내 신릉군에게 전달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결국 장렬한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 작품이 집필된 무렵에 창작된 여타 역사극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호부」 역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힘을 합치고자 했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통일전선이 붕괴하는 데 대한 작가의 분노 어린 호소가 가득 담겨 있는 작품이다.

작가의 글
내가 「호부」 를 쓴 것은 항일전쟁 시기, 국민당 반동 정부가 일으킨 제2차 반공 고조, 즉 신사군 사건 뒤였다 그 당시 장개석 반동파는 이미 노골적으로 “소극 항전, 적극반공”이라는 죄악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쓴 극본이 넌지시 암시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의 현실과 위나라 안리왕의 “소극항진, 적극 반대 신릉군”과 비슷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슷할 뿐이다. 극본은 엄격한 검사를 받았다. 중경에서 공연할 당시에 단 한 차례도 커다란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고, 게다가 공연을 하고 난 뒤에는 재차 공연도 다시는 할 수 없었다. 그 극본이 근래 들어 상해 월극의 「신릉공자」, 북경 경극의 「절부구조」, 복주 민극의 「신릉공자」처럼 각지에서 개편된 작품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세 가지 정도 된다. 이들 개편된 극본들은 나는 아직 보지는 못했다. 또 공연도 본 적이 없기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각 지역에서 개편한 사람들과 공연한 사람들은 공통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한데, 그것은 바로 신릉군의 “항진구조”를 오늘날의 “항미원조"에 빗댄다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타당치 못한 처사라 생각한다. 우리들의 “항미원조”는 전국적으로 일치단결하여 벌이는 미증유의 애국운동인데, 어떻게 신릉군 당시의 “항진구조”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비유한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늘날의 안리왕은 누구인가? 역시 장개석인가? 오늘날의 그는 이며 안리왕과 짝을 이룰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비유는 타당하지 못하 것이며 반역사적언 방법으로서 비판을 받을 만하다. 선릉군과 여희 같은 역사인물은 칭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내 생각으로는 “절부구조”라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칭송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시에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예를 들어 순자는 선릉군을 매우 칭찬하면서 “역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임금의 명에 대황하고 임금의 소중한 것을 훔쳐서 임금의 일에 반대함으로써 나라의 안전을 지켜내고 임금의 욕됨을 없애주었으니 그가 세운 공은 나라의 커다란 이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그것을 일러 불이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릉군은 전국시대 4공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가장 못한 것은 맹상군이다. 그들은 비록 다투어 이름을 날렸지만 본질은 매우 달라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오늘날 사적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역사인물에 대해서 공정한 비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인물에 대해서 공정하게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것은 역사에 대해서 공헌한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시황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다. 또한 진시황 통일 이전의 모두 항진 그룹을 역사의 죄인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반역사주의적 관점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 한 개인의 힘이 아니다. 진나라로 말하자면, 효공(孝公) 이래로 특히 상앙의 변법 이후로 6대에 걸친 정치적 업적이 누적된 것이다. 중국의 범위에서 말하자면, 춘추 이후의 각국 정치 정세가 누적된 결과물이다. 춘추의 12제후가 전국의 7웅으로 병합되고, 다시 진나라에 대항하는 데로 합쳐진 것으로서 각국의 선각자들과 혹은 적게 혹은 많이 역사에 대해서 공을 세운 것이다 더욱이 말살할 수 없는 것은 인민대중의 힘이다. 선각자들은 인민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통일을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인민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면 어떠한 일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행히 완성했다고 해도 공고하게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인민대중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에 겨우 13년 만에 천하를 잃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전체적인 변에서 문제를 보지 않고, 또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보지 않으며 본질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보지 않으면 진시황의 중국 통일은 그의 모든 면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심지어 신릉군의 ‘항진구조’조차도 중국 통일을 가로막는 범죄행위로 간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섭(陳涉)과 오팽吳廣)의 혁명도 중국의 통일을 파괴한 범죄행위로 질책 받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당연히 타당하지 못한 것이다. 역사주의 관점으로 문제를 볼 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전국칠웅은 모두 중국을 통일시킬 자격이 있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발전하면서,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등 세 나라가 진을 나누고 전(田)씨가 제나라를 탈취한 것은 혁명적 수단을 취한 것이었고, 진나라와 초나라 연나라가 취한 것은 개량주의였다. 진나라의 개량주의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상앙의 정책이 진나라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었고, 일관되게 집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다른 국가는 혁명성을 잃기도 하고 철저한 개량이 이루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진나라의 성공은 6국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릉군이 위나라 안리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의미를 다소나마 알 수 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신릉군이 “동굴 속에 숨어사는 사람이라도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위나라를 발전시킬 마음이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위나라가 만약 그의 생각에 비추어 발전하였다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마당에 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겠는가? 문제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중국을 통일시킬 생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진나라의 통일방법은 그다지 고명하지 않다. 진나라가 장평에서 조나라를 격파하는데, 조나라 장수와 졸개 40만여 명이 장평에서 죽거나 항복한 일을 보면 분명해진다. 당시 인민들은 중국의 통일을 성심으로 염원하였다. 이는 춘추시대 이래 역사발전의 추세였다. 하지만 진나라 방식의 통일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 신릉군의 방법은 약간 달랐는데, 애석하게도 위나라 안리왕이 시종일관 그를 믿지 않았고, 더욱 애석한 것은 그 자신의 혁명성도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인민대중을 이끌어나갈 책임, 그리고 관동 육국을 이끌어나 갈 책임을 포기함으로써 10여년의 세월을 허송하고 말았다는 사실이고, 그 결과 진시황이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진시황은 실재로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오래 갈 수 있었을까? 겨우 13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민의 엄격한 비판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진시황에 대해서 공평하고 합리적이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져야 하지, 전체적으로 부정하거나 전체적으로 긍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전체적으로 긍정한다면, 그것은 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개인적 영웅주의가 될 것이다. 진나라 이전 시기 역사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현안으로 남아 있고, 나는 여기에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고대에 관련된 문제는 오늘날에도 그다지 급박한 문제는 아니다. 니는 모두가 현대 연구, 특히 근 백 년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집중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비극의 의미를 부가해서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비극의 교육적인 의의는 희극보다 강하다.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힘이 아직 충분히 크지 않고,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역시 아직 충분히 쇠약해지지 않았을 때, 비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비극의 연극적인 가치는 단순하게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슬프고 분한 정서를 힘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막 생겨나는 성분을 보호하고 죽어가는 성분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고전적인 비극작품,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델로』, 푸시킨의 『청동기사』 등은 여전히 예전 방식으로 공연되고 있고 환영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 중국의 혁명은 승리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의 연극이 비극을 공연하지 말아야 하고 일률적으로 희극을 공연해야 하며 무대에서는 대단원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친구는 비극의 끝맺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기가 하경하고 사악한 기운이 상승하는 것을 쉽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나는 이러한 견해가 일종의 기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정반대로서 사람들은 비극의 끝맺음이 가슴에 가득 찬 정의로운 기운으로써 사악한 기운을 진압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전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연극 관객이 극중의 악인이 너무 미운 나머지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그 악인 연기를 한 배우를 때렸다. 비록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비극의 진정한 작용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연극의 성분이 비극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이 비극성분이 어떻게 씌어 졌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국가(國歌)"를 생각해보자. 가사 안에 비극적인 정서도 매우 짙게 들어가 있어, 몇몇 친구들은 “가장 위험한 때”나 “최후의 목소리” 등의 문장을 쓰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듯 경계하는 문구야말로 우리의 비장한 투쟁정신을 격발시킬 수 있다. 비극의 정신이 바로 이러한 정신이다. 그 목적은 투쟁을 호소하고 비장한 투쟁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의 작용은 막 생겨나는 힘을 고무시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감으로써 승리를 쟁취하고 공고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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