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년 ;세대'지에 발표한 단막작품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는 산부인과 여의사를 아내로 둔 남편의 자격지심으로 발생한 외도 사건을 담은 작품이다. 남편인 안영복은 아내 고영애가 전문직 여성으로서 순종적인 아내의 역할에서 벗어난 후 성적인 욕망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고 믿고 있다. 남편의 사고는 당시 사회가 지니고 있던 직장 여성에 관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1960년대에 여성의 진정한 자리는 ‘가정주부’로 귀결되었다. 일하는 여성에 관한 논의들이 다수 언급되었지만 여성의 직장은 결혼에 이르는 과도기로 여기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여원』에서는 직장 여성이 허영과 사치에 빠져 부자 엘리트 신랑을 쟁탈하려 싸우는 대신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를 자각하며 사회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질타의 의견이 개진되었고, 개인적 행복보다 공적 가치를, 이익보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라는 의견이 사회적으로 공명을 얻은 시기였다. 안영복은 본인의 불안과 충동의 원인을 아내의 문제로 탓하고 있다. 고영애는 아내로서의 자격이 없다면 정식으로 이혼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안영복은 이를 거부한다. 안영복에게선 고영애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흔들리는 가부장 역할에 미련을 갖는 길항과 이중성이 발견된다. 극 중 고영애도 남편이 아닌 젊은 남성 박찬규와 외도중이다. 박찬규는 2년 전 아내가 첫 아이를 낳다 고영애의 병원에서 죽게 되었을 때 충동적으로 고영애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주판만 튕기는 회사원”인 자신을 여의사인 고영애가 좋아해주는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듯 표현한다. 그래서 그녀를 만날 때마다 불안감을 드러낸 것이다. 작가는 이들을 모두 비판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당시 외도에 대한 불균등한 시각에서 벗어났다. 한쪽만의 일방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각을 견지함에도, 여성인물의 반성을 토대로 급작스럽게 부부를 화해시킴으로써 원 가족으로 회귀하는 보수성이 드러난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남성인물도 전문직 아내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안영복은 산부인과 의사인 고영애가 자신의 몸을 성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이용했다고 의심하며 모욕을 당한 것으로 여긴다. 이에 수치심이라는 정동을 느끼고 방어적인 행동으로 외도를 한다. 편집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격퇴하는 데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안영복의 외도 행위는 투사적 방어기제로 설명된다.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고자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은 채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지만, 아내와 남편의 대화를 보면 안영복의 편협한 자격지심에서 나온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아내는 외도를 “남편에게 배운 철학”이라 표현한다. 결혼 후 15년 동안 외도생활을 한 남편에게 대응하고자 외도를 했지만 남편은 자신을 의심한 아내를 비난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영복의 행동에는 편집성 성격장애의 특징인 ‘자기이행적 예언(self fulfilling prophecy)’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편집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미리 예언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즉 편집성 성격장애자가 대인관계 중에 의혹을 내보이기 때문에 상대는 그에게 다양한 형태의 분노, 또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결국 편집성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아내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15년간 외도를 했기에 아내 역시 그에 맞서 분노의 반응을 보였음에도 안영복은 반성 대신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확신을 갖는다. 이들은 결국 타인들이 자신을 기만할 것이고 자신의 의심이 확인된다는 믿음으로 관계에 접근하는 태도를 보인다. 타인에 대한 적대적 신념과 부정적 측면에 대한 선택적 지각, 타인에게 적대적 행동을 유발하고 타인의 적대성에 대한 신념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됨으로써 편집성 성격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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